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55 향방 없는 달음질

푸른 섬 2015. 11. 1. 19:00

 

향방 없는 달음질

고린도전서 924-27

어제 제 딸이 축구경기를 했습니다. 축구 경기를 하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이기려고 축구하지 지려고 하는 축구 경기가 있을까요? 분명 목표가 있기에 연습을 하는 것도 즐겁게 할 수 있었겠지요. 주장 언니가 삼위 안에 입상하면 자기 집에서 파티를 열어 준다고 했답니다. 이런 목표가 있기에 열심히 경기를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야곱대로 이해하면 그 말씀을 이루는데 야곱의 이성과 야곱의 과학과 야곱의 열심과 기도를 통해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그것을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야곱을 보면서 야곱의 이런 행동을 신앙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창세기32장에 나오는 얍복강 가에서 일어난 사건조차 야곱의 간절함으로 해석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이들의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너무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요. 그래서 자신의 삶은 흐지부지한 삶이 아니라 뭔가 분명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시내 산 위에서 증거 판 둘을 받을 때에 시내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불안입니다.

 

자신들을 인도하던 모세가 눈에 보이지 않자 그들의 불안을 해소해 줄 금 송아지를 만들어 그 금송아지를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찬양을 합니다.

 

우리가 볼 때에 도저히 이해불가능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모세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면 불안이 해소될까요? 해소됩니다.

사람들이 부적을 왜 갖고 다니고 붙입니까? 왜 집집마다 마리아상을 만들어 놓고, 불상을 갖다놓고 촛불을 켜고 기도합니까? 왜 자동차 바퀴에다 빨간 리본을 달고 다닙니까?

 

모세가 안보이면 다른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들 눈에는 모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본게 있잖아요. 그렇다면 모세와 동일한 권위를 가진 자를 뽑으면 되지만 사람은 뽑지 않고 자신들의 정성이 담긴 황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하늘에 있는 형상이나 땅에 있는 형상이나 사람의 형상이나 동물의 형상을 만드는지를 아시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런 죄인들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럽의 경우 기독교의 영향이 큽니다. 기독교가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잘 알아요. 물론 구약성경도 잘 알겠지요. 그런데 그들이 지은 예배당을 보면 형상들로 가득 합니다. 내부가 되었던 외부가 되었던. 나름 자신들이 존경할 만한 사람의 형상은 예배당 안에 가득 채워 놓았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모습이라 해서 그림으로 채워놓든지.

 

인간들은 하지 말라는 것은 꼭 이런 식으로 행합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 듯이 예배당을 자신들을 위한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예배당이 뭔가 대단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배당이 아니면 그러면 어디에 그런 것을 만듭니까? 집안에 만들지요. 자식, 아내, 남편, 손자, 손녀 등등.

물론 돈이 이 모든 불안을 일거에 해소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제발 나의 불안을 해소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이유가 그들의 불안해소를 위해서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자신에게 뭔가 도움이 되고 이용가치가 있기에 예수님을 믿습니다. 만일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이용가치가 없다면 예수님을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18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 하십니다.

 

주를 증언하였기에 주를 위하여 갇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목표하는 바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 땅에서 싸우는 싸움은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땅에서 왜 돈을 벌고 자식을 키웁니까? 왜 뼈 빠지게 고생하며 삽니까? 목표가 있잖아요.

제가 인천에 잠시 있을 때 어떤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의 메일 이름이 목표 오백만원이었습니다. 십일조 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예배당 짓는데 바치려고 하는지 아니면 딸 시집 보낼 자금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런 목표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그런 목표는 나쁘지는 않지요. 그러나 그것은 죽어봐야 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으면 부자 되고 건강하다. 좋은 대학 가고 성공한다. 이런 목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은 자신의 삶은 싸움이면 그 싸움은 허공을 치는 싸움이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은 달음질 하는 인생으로 향방 없는 달음질 하는 인생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그 다음 나오는 말은 향방 있는 달음질이 어떤 것인지, 허공을 치지 않는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 이야기가 나와야 하겠지요.

 

그런데 27절을 보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함이로다.”

 

자신 만만하게 향방 있는 달음질, 허공을 치지 않는 싸움이라고 했다면 그 다음 뭔가 우리의 기대를 충족해 주는 것이 나와야 하는데 이게 뭡니까?

 

자기 몸을 쳐 복종한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자기 부인이지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는 마태복음 162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뭔가 대단한 것이 나올 것이라 생각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늘 제자리 같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고민이 이런 고민이 아닐까요? 출애굽 했으면 그 다음은 그 다음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계속 애굽의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이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출발이 있다면 그 다음은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출발이 있는데 늘 출발선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우리는 늘 변화를 느끼며 살고 있지요. 그리고 그 변화대로 본인도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공부를 해도 과거보다 더 잘하기를 바라고, 기도를 해도 과거보다 더 기도 잘하기를 바라고, 예수님을 믿더라도 과거보다는 더 잘 예수님을 믿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이런 맘으로 성경을 들여다보니 제자리 뛰기 하는 이스라엘이 꼴사납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각색합니다.

변화되어야 되는데 변화되지 못한 이스라엘을 비판하면서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변화된 삶을 강조합니다.

 

달리 말하면 발전되는 자신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은 수에 칠 가치도 없습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데 우린 이런 인생 인정하기도 싫고 그런 인생으로 살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어떤 희망을 가졌을 때가 있었지요. 예를 들면 난 돈 백만원만 있었으면 좋다고 생각했을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내 집을 가졌으면 하는, 아니면 직장을 가졌으면, 아니면 시험 몇 점을, 아니면 내일 소풍인데 빨리 소풍날이 되었으면, 아니면 내일이 월급날인데 월급날인 내일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램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러한 바람이 이루어진 날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이 듭니까?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이 더 이상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목표가 생겨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자신은 결코 허황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허황되지 않는 삶을 산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후반부를 보면 인간들이 자신들의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우상을 만들고 쾌락이라는 쾌락은 다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또한 아주 고상한 쾌락을 찾아 나서는데 그 쾌락이란 다름 아닌 율법을 지켜서 자기의 의를 세우면서 남을 정죄하는 쾌락, 이보다 더 좋은 즐거움은 없을 것입니다.

 

사사기 20장을 보면 레위인이 보낸 편지를 보고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결합니다. 레위인이 보낸 편지가 무엇입니까? 레위인 자신의 첩의 시체 토막입니다. 그들은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를 기준으로 자신들이 보기에 의가 아닌 악을 처단하기 위해 대동단결했습니다.

 

자신들은 결코 심판받을 자들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악하다고 하는 자들을 심판함으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빌립보서 19-1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을 읽어보니 부담이 됩니까 아니면 감사가 나옵니까?

 

사람들은 이 말씀을 대하면서 부담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대로 살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치고 이 말씀대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 있을까요?

사보바울도 분명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이 성경을 읽는 누구든지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마음 들지 않습니까?

안든다면 여러분들은 이 본문을 읽은 적이 없거나 본적이 없거나 무시하는 태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무엇이 주님보시기에 선인지 악인지 분별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하는 일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아닌지를 알면 골라서 행동할 수 있잖아요.

 

진실하고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싶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우린 이런 말씀이 싫어서 성경을 안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성도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지요.

분명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방금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소원 우리의 바램이 되라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헛되다는 것을 기초로 하여 말씀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만일 내가 헛된 자라는 근거로 하여 이 말씀을 본다면 이 말씀 속에 누가 보입니까?

주님이 보입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이 보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몸의 지체인 성도를 어떻게 다루시겠다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우린 그냥 믿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실 것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인간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접근하는 방식은 자신이 헛되지 않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드러내기 위해 이 말씀을 대하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지 않든지 성경을 읽어도 자신이 왕임을 더욱더 곤고히 하기 위해 성경을 해석하고 아니면 자신의 삶을 살 뿐입니다.

 

우린 늘 허무와 만납니다.

우리 모두 자녀를 키우고 있지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감사하겠다는 생각 해 보신 적 있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건강하게 태어나니 그 바램이 어떻게 됩니까? 허무로 돌아가 버리지요. 시험점수 잘 못 받아 오면 어떻게 됩니까?

심지어 텔레비전 드라마 프로야구 중계한다고 결방하니 허무하다고 난리 법석을 뜹니다. 그녀는 예뻤다. 그런 한국 드라마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을 허무 속에 가두어 살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향방 없는 달음질이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허공을 치는 싸움이 나오지요.

도대체 무엇이 향방 없는 달음질이며 무엇이 허공을 치는 싸움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산다. 주님이 우리를 믿게 하시는 것이 향방 없는 달음질 같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향방 없는 달음질 같습니까?

 

사도바울을 한번 봅시다. 그 인생은 오히려 향방 없는 인생 같지 않습니까? 머무를 줄 모릅니다. 우린 담임목사가 되면 그 담임목사 자리를 영원히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제가 만일 사도바울이라면 한 지역 부자 동네에 아름다운 예배당을 짓고 죽을 때 까지 목회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제 이야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교회가 그런 식으로 하고 있지요.

오히려 이런 종신목사되는 것이 향방 없는 달음질이 아닌 삶이 아닙니까? 싸움을 허공에 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싸움을 한 것 같잖아요.

 

그런데 만일 죽을 때 아무것도 없어요.

사람들도 배반해 떠나 가버렸어요. 디모데 후서 4장을 보면 허무한 이야기를 하잖아요.

10절 이하를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도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사람이 끝이 좋아야 한다고 하잖아요. 끝이 안 좋아요. 예수님이 그러했습니다. 끝이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 버렸지요. 떠난 정도가 아니라 배반하고 팔아먹고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허공을 치는 싸움이 아닌 진짜 싸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향방 있는 달음질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허공을 치는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향방 없는 달음질 하는 불쌍한 사람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 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향방 있는 달음질 하는 자들입니다.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하는 자가 아니라 영적싸움을 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현재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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