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56 세례

푸른 섬 2015. 11. 8. 22:22

 

구름과 바다에서의 세례

고린도전서101-4

주님의 영을 받은 사도바울이 구약을 보는 관점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출애굽기1321-22절을 함께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분명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문제는 그들을 인도한 곳이 홍해였습니다. 뒤에는 애굽군대가 뒤 따라옵니다.

 

우리같이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라면 구름기둥 독단적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을 인도하시면 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왜 모세에게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고 명하십니까?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신 이유는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 갇혔다. 이제 그들은 나에게 다 죽었다.’ 라고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구름 기둥이, 불기둥이 그냥 바닷가에 멈추면 되잖아요. 모세를 통해 구름 기둥 불기둥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할 것이라고 한번만 알려주면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움직이면 되잖아요.

 

여기에 꼭 모세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모세가 홍해 바다 위로 손을 내밀 이유가 있습니까?

구름기둥 불기둥이 곧장 홍해바다를 가르면서 이스라엘 자손 앞서서 인도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꼭 앞장 세워서 일을 하십니까?

 

그 이유는 모세를 앞장 세워야만 장차 오실 십자가 지신 주님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해 버렸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잘나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행함으로 말미암아 죽임당한 유월절 어린양이 여전히 자신들의 손에서 죽임당하고 있다는 것을 구약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로 왕의 군대에 의해 죽는 죽음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죽는 그 죽음은 실상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과 만나는 문설주에 피 없는 집의 장자의 죽음과 만납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지요.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 다음은 구원이 지속되지 않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이런 구원밖에 없습니다. 한번만 구원받으면 영원히 받는 구원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왜 다시 이런 구원이 있어야 합니까?

 

다시 출애굽기를 살펴보겠습니다. 구름이 홍해바다를 건널 때 무엇을 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을 앞서 인도해가던 구름 기둥이 이스라엘 자손 맨 뒤쪽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는 애굽 군대를 막았습니다. 전쟁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셔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싸움을 하는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구름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 가운데를 마른 땅으로 건넜습니다. 물론 바닷물들은 좌우에 벽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바다에서 어린양의 피가 없는 자들의 죽음이 반복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죽음을 보면서 다시 한번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을 만납니다. 그들의 구원이 그들 자신들을 위한 구원이 아님을 확인합니다.

 

로마서63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합니다.

세례라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기에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개별적 세례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세례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하기 위한 한 세례만 있을 뿐입니다.

 

이 본문을 근거해 출애굽기를 본다면 이 말은 오히려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과 연결하기에 더 적합하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구름기둥과 홍해 바다 사건을 세례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세례가 도대체 몇 번이 됩니까? 벌써 두 번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세례가 두 번밖에 없습니까?

 

그러면서 곧장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이제부터는 세례 받은 후의 삶이 전개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까지 산 삶은 어떤 삶이었습니까?

역시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신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서 그들의 원망이 있습니다. 원망이 앞선 다음 신령한 음식과 음료가 공급되었습니다.

 

놀라운 말씀은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다고 표현합니다. 즉 그들을 따르는 분에 의해서 신령한 음식을 먹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따라 다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따라 다녔다는 말은 끊임없이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죄를 쏟아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세례가 반복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어디에 그리스도가 나옵니까?

이것은 사도바울은 억지 해석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영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도바울은 홍해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그 해석을 따라 가야겠지요.

그런데 많은 목사가 신학자들은 이 해석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논리가 안 맞는다는 것이지요.

사도바울의 이런 해석은 너무 그리스도 중심적인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합리적은 교육을 받은 우리들이 보아도 사도바울의 해석이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믿어져야 합니다.

이게 믿어져야 성도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무언가 납득시키고 이해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달리 말하면 믿을 사람만 믿으라.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만 들으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아무 곳에나 다 적용한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스라엘 자손은 유월절이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는 현장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과거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항상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으니 자신들의 구원은 여전히 지속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세를 원망하지요. 자신들은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 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구원이란 자신들이 바라는 삶의 지속을 위한 구원입니다. 적어도 이런 죽음의 위험이 없는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곳, 자신들의 입맛을 채워주는 지도자, 자신들을 무시하지 않는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사사기23-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의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여호와께서 분명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나안 주님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을 헐라고 하셨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사사기 2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너희들은 이제부터 개 고생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보김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왜 소리를 높여 웁니까?

어디서 본 장면 아닙니까? 혹시 뭔가 또 오르시나요?

가인이 그렇잖아요. 자기 죄벌이 자신이 지기에 너무 무겁다고 기도하잖아요.

 

이스라엘 자손이 원하는 하나님은 우리들이 원하는 하나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돈 잘 벌게 해 주시고, 집에 우한이 없게 하시고, 자신들 건강하게 공부 잘하면서 잘 크게 해 주시고, 우리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게 해 주시고, 우리 민족이 나라가 세계가 내가 사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해 주는 하나님 아닙니까?

 

이건 우리들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는 자들에겐 십자가 사건이 과거에 한번 일어난 사건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미 구원받았기에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인생이기에 이제부터 내가 바라는 모든 것들은 새 생명 받은 자가 원하는 것이니 모든 것들이 주님 앞에서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생각을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를 포함한 여러분들 모두가 이런 생각을 기본으로 깔고 살아갑니다. 문제는 누가 세례 받는 자인가?’ 입니다.

제가 왜 현재로 말씀드렸는지 앞서서 말씀드렸습니다.

 

세례를 과거로 인식하는 순간 그는 이미 주님의 십자가를 조롱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생존의 욕구를 말했을 뿐입니다.

심리학자 메슬로우가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를 생존의 욕구라고 했습니다. 이건 사실이지요.

어느 누가 생존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그 기본적인 것을 요구한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생존하려고 돈을 쫓아다니고 있잖아요.

 

여러분. 돈 쫓아다니는 것이 뭐가 잘못입니까?

 

중학교 몇 학년인지 모르겠는데 그 아이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질문이 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랍니다.

어릴 때부터 얼마나 많이 들어 왔던 질문입니까? 자기 실력이 안되니 자기 꿈을 이야기한다는 것도 짜증나겠지요.

 

그런데 꿈이 있다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자아실현을 하겠다는 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평생 살고 싶다는 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적들 없는 곳에서 평안히 살고 싶다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에겐 세례가 없습니다. 세례가 없다는 말은 주님이 주시는 신령한 음료와 음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좀 더 세밀하게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 같은 신령한 음료,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었다고 하지요. 이런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 같은 이라는 말을 좀 더 생각해 봅시다.

 

다 같은이라는 말은 비교 대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돈 많이 가졌든지 건강하든지 하지 않든지, 어떤 것도 다 같은것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만 눈앞에 보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가 되겠지요.

 

주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만나고 사느냐고 말입니다.

고린도전서15장에 가면 사도바울은 자신이 날마다 죽는다고 말합니다. 날마다 죽음을 만나고 사느냐 말입니다.

 

왜 사람이 죽습니까? 죄 때문에 죽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위대하기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하지요?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죄 때문에 죽습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자신의 소망은 십자가 지신 주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은 날마다 죄인으로 계속해서 발각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살아가는 것이 자신은 죄만 지을 분이요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성경말씀이든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결부시키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버리면 너무 단조롭잖아요. 자신이 나름대로 의롭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기껏 십자가 이야기하기 위해 하늘의 별을 만들었는가?

이 대 우주를 만들었는가? 그래서 십자가 외에 다른 것들을 주장하지요.

 

사람들은 십자가만 전파되지 않는 것에는 별로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국정교과서를 만든다고 하면 매우 분노를 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지 않으면 그 대통령 임기 내내 그 기분 나쁩니다.

내가 응원하는 축구팀이나 야구팀이 이기지 못하면 하루 종이 찜찜하면서 그 다음 경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피를 만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아쉬움도 분노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내가 원하는 바가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원망에 원망을 하면서 그것을 얻으려고 발악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살려주시는 대로 삽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와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닙니다.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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