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50

푸른 섬 2015. 9. 13. 19:34

 

 

지극히 당연한 일

고린도전서97-11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 할 사람 없습니다. 어느 누가 자기 목숨을 그냥 내어 놓습니까? 미션 임파스블의 주인공 탐 크루즈의 출연료가 그래서 엄청 높답니다.

 

농사를 왜 짓습니까? 포도농사 쉽지 않습니다. 누굴 위해 농사 짓습니까?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포도농사 지어 남 주려고 합니까?

 

양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습니까? 농경사회 이야기니 와 닿지 않지요.

 

오늘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직장생활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서 월급 받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사장 돈 많이 벌어 주기 위해서입니까? 그런 사람 없습니다.

사장이 월급 안주면 어떻게 합니까?

 

고소를 하든 그만 두든지 합니다.

 

왜 사업을 합니까?

돈 벌기 위해서지요. 그 수고의 댓가는 반드시 누구에게 와야 합니까?

일하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지요.

 

오늘 본문이 이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하든 직장생활을 하든 그 일을 통해 밥 먹고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수고했으니 그 수고의 댓가는 반드시 여러분에게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되지요. 아니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이 땅에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왜 성경에서 합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땀의 댓가는 자신이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데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겁니다.

 

9절을 봅시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의 예를 들어 군인이나 포도 농사짓는 사람이나 양떼를 기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누가 봐도 사람의 예를 들어 놓고 하는 말이 이것은 사람의 예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신명기254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신명기 254절 말씀은 분명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거기 어디에 복음 전하는 사람이 나옵니까? 나오지 않습니다. 거기 어디에 포도 농사짓는 사람 나옵니까? 나오지 않습니다.

 

신명기 254절은 누가 봐도 소를 염려한 말씀입니다. 동물애호가들이 이런 구절을 좋아하겠지요. 그래서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이들 눈에는 소를 염려하시는 하나님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말씀이 소를 염려한 말씀이 아니라고 합니다.

기가 차지요. 글자대로 해석해야 되지 않습니까?

왜 문자대로 해석하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이 반칙을 씁니까? 사도바울이 대도 않는 성경해석법을 적용하는 겁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누구를 전합니까?

주님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모세가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쓴 신명기 25장 말씀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사도바울의 이 해석이 맞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어디에 적용 시키는고 하면 우리를 소에 적용합니다. 우리 즉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소라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목사들이 기분좋아하겠지요. 목사가 복음 전하는 자니 소가 된다. 그러면 먹을 것 제공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누가 소를 다룹니까? 주인이 소를 다루지요. 소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소를 이용해 밭가는 자가 따로 있고, 그 소를 이용해 밭을 갈므로 소망을 가지는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곡식 떠는 자는 그 소와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겁니다. 즉 주인의 기쁨에 소가 참여합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4장에서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제자들을 동네에 먹을 것 구하러 보냈습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 구해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먹을 것이면 먹을 것이지 다른 먹을 것이 어디 있습니까? 분명 자신들에게 먹을 것 구하러 보냈다면 예수님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이 갖다 준 먹을 것을 갖고 말씀하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양식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십자가 지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추수 이야기를 합니다. 넉달이 지나야 추수인데 벌써 추수 때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이 땅의 계절이 예수님께는 의미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중심으로 계절이 다시 짜집니다. 항상 추수 때가 됩니다.

 

마태복음2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시장하셨습니다.

마침 길 가에 무화과 나무가 있었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계절이 무화과 나무 열매 맺는 계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잎사귀 밖에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해 버립니다. 그러자 곧 말랐습니다. 마가복음1113절에 분명 무화가 때가 아니라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정신병자입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이 정신병자이지요.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너무나 억지스럽습니다.

우리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을 택합니다.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벌써 추수 때라고 하십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삭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은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은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보면 거두는 자가 있고 뿌리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려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4:38).”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노력한 것을 자기가 거두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세상추수가 그러하지요. 자신의 땀, 수고의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타인의 노력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추수군 들인데 이들 추수군들은 자신들이 노력하지 않는 일에 대해 거두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희생에 그들이 참여되었다는 겁니다.

 

즉 주님의 수고에 그들이 참여 되었다. 주님이 그들을 집어넣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추수가 자신의 수고와 땀에 대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열매를 자신이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 어떻습니까?

 

신명기63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의 특징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을 지킴으로 포도농사를 지을 수 있고 그 결과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을 오히려 진멸 시키십니다.

진멸인데 무슨 농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신의 수고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7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애굽에서만의 구출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 갈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에서 양떼를 치거나 포도농사를 짓거나 군인생활을 하는 모든 것은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그러니 농사를 본인이 지었다고 해서 자신이 먹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명기262절을 보면 토지 소산의 맏물을 여호와께 드립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있어 군인이 되었든, 포도 농사가 되었든, 양 떼를 치든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군인이나 포도원 농사지기나 양떼지기는 그 자체가 주님의 사랑의 증거물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 예대로 말하면 지극히 당연한 그것이 주님 안에서는 은혜라는 말입니다.

 

밭가는 분도 주님이시고 곡식을 떠는 분도 주님이시고 거기에 소로 부림을 당하는 자가 복음 전파자라는 겁니다. 주님이 소를 부리십니다.

 

즉 농사짓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직장 다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사업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니 그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여러분은 주님이 부리는 소라는 말입니다. 목사만 주님이 부리는 소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자들이 주님이 부리는 소입니다. 자신이 주님이 부리는 소임을 아는 자는 복 받은 자입니다.

 

자신이 주님이 부리는 소임을 모르는 자는 모든 공로를 자신에게 돌립니다. 내가 수고해서 돈 벌었으니 나는 이 돈을 나를 위해 사용해도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으니 그 수고의 댓가를 내가 받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이 주님이 부리는 소임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사사기 17장을 보면 미가 집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나옵니다.

엄마의 관심은 자기 아들 잘되는 것이고 그 아들 잘됨을 위해 한 신상은 새겨 만들고 한 신상은 부어 만들고 은은 여호와께 드립니다. 또한 신당이 자기 집에 있습니다. 그래서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돈 안드는 제사장이지요. 레위지파 쪽에서 제사장을 구하게 되면 돈이 듭니다. 비용절감을 위해서는 아들 중 하나를 제사장으로 삼음으로 그 제사장에게 지불하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지요.

그래도 뭔가 찝찝하고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떠돌이 레위인이 자기 집으로 왔을 때 그를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복 더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죠. 아무래도 목사가 기도해주면 더 효과가 있을 것 같잖아요. 레위인은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즉 그 집에 축복을 제대로 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아들이 집안 잘 되게 기도하지 집안 망하라고 기도하지 않지요. 싫은 말 하겠습니까?

 

본래 레위인들에겐 땅이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땅의 소산으로 먹고사는 자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십일조와 맏물을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레위인이 떠돌이로 산다는 것은 먹을 것이 해결 안 된다는 뜻이지요. 달리 말하면 나머지 지파 사람들이 십일조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 하지 않습니까?

 

땅의 소산이라는 것은 나의 기도와 열심과 헌신과 땀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레위인에게 십일조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더 중한 것은 그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내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굉장이 중요합니다.

 

만일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내 소유가 된다면 십일조 철저하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제사장이요 레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이 땅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생각이지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왜 헌금을 열심히 합니까? 자신의 열심과 희생이 이 땅에서 축복을 가져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사시대와 똑 같지요.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용도로만 필요할 뿐입니다.

그들이 그런 생각으로 헌금하고 봉사하는 이유는 자신의 헌금과 봉사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돈 버는 것도 자신의 수고요 그 번 돈도 자신의 것이라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희생물이 축복과 구원을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너희 희생, 수고는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너희 죄만 가득하고 주님의 사랑만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수고해서 돈 벌어 그 돈을 여러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생각이 십자가의 원수가 갖는 생각입니다.

주님의 희생 공로를 자기가 챙기는 것입니다.

 

뿌리는 분, 거두는 분이 따로 계십니다. 우리에게 거두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거두는 행위를 부인하게 하기 위해서 거두게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영광을 뿌린 분, 거둔 분에게만 돌리도록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돈을 벌게 하셔서 주님의 십자가로 우리를 몰아가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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