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59

푸른 섬 2015. 12. 3. 20:18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

고린도전서 1023-33

성경말씀을 읽어 보면 짜증나는 구절이 한 두 구절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저는 여기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한다고 했을 때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합니까?

 

주석들을 읽어 보면 다른 성도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자유라고 말합니다. 들어 보니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이 그렇게 말씀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석하는 자들이 지난주에 누구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들이라고 했지요.

 

육으로 난 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바리새인 해석 그 이상을 해 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자기 말씀으로 받아 들여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의 속성입니다. 그러니 성경해석의 최고경지에 오른 바리새인들의 해석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33절에서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셨는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사도 바울이 어떤 식으로 그렇게 했는지 관심 없이 우리가 꿈꾸는 교회상을 그려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사도바울을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타인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오늘 본문을 보면 맞는 것 같지요. 그런데 문제는 사도바울의 자기 부인이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자기 부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앞서 주석들을 이야기 했지요. 주석들에서는 사도바울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도바울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하는 말이 우상제물 먹는 문제와 관련하여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이 이런 사도바울의 행위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이런 행위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을까요 아니면 미움을 받았을까요?

 

마태복음99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 앉아 음식을 드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께는 노골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런 말이 여러분 듣기에 어떻습니까? 기분 좋습니까 나쁩니까?

만일 삼자의 입장에서,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 말을 들으면 아무런 느낌 없을 겁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 말이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일에 대해 그 당시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바리새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예수님께 박수를 보냈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했습니까?

 

아마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이런 예수님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박수 치잖아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되면 자선 냄비 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고 알려 주고 난리 법석을 떨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이 땅에 오신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가장 미워하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의인이라 생각하지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과 한 편이라 생각하지 예수님의 적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한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같이 행하는 자는 절대 하나님과 한편일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신다면 자신들 같이 말씀대로 사는 자를 칭찬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시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실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분명 우리들 보기에 선한 행동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 자들 눈에는 예수님의 선한 행위가 악한 행위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쓸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예수님을 환영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모든 일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싸움이 일어납니다. 전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지요.

 

사도바울은 어떻습니까? 분명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린도 전서만 읽어 봐도 사도바울의 편지를 받는 자들의 반응이 어떻겠습니까?

우리야 항상 기대하지요.

 

사도바울 말에 모두가 순종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늘 따라 다니지요.

 

그러니 바울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는 말은 철저하게 이 말씀에 해당되는 자가 있고 그렇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을 품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도바울의 이 말에 아멘 하는 자들은 그 인생이 어떤 인생이 된다는 말입니까?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인생이 아니라 미움 받는 인생,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걷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우상 제물을 먹고 먹지 않는 행위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이 행위가 어떻게 미움 받는 행위냐고 하겠지요.

모든 것이 가하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우상제물을 먹지 않는 사도바울이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믿음 없는 자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 달리 우상 제물을 먹는다면 타인의 양심을 위하여 왜 먹느냐고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항상 어떤 입장에서 성경을 보려고 합니까?

좋게 보려고 하지요.

 

여러분 요셉 알지요?

창세기37장 이하에 요셉이 나옵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이 꾼 꿈 때문에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미움 받아 죽게 되지요.

 

누가 준 꿈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이지요.

 

그 꿈은 형제들을 살리게 하는 꿈이잖아요. 그렇다면 형제들이 좋아해야지 왜 미워합니까?

복음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복음을 받은 자는 그냥 미움 받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난 형제가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술 마시지 않겠다고 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그게 의냐고 물어 보세요. 버럭 화를 낼 겁니다. 내가 뭐 잘못했냐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대로 행했는데 얼마나 잘했냐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미움을 받습니다. 자신이 행한 것을 의로 여기는 습성, 이것이 십자가 사건을 반복시킵니다.

우리가 딱 이런 식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살고 싶잖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싶잖아요.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말씀에 걸려 드는 겁니다. 이런 태도가 바로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의 태도입니다.

 

우린 먹든지 마시든지 모든 것을 나의 영광을 위해서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조차 나의 영광을 위해서 지키려고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합니다. 타인들이 그것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지요.

거기엔 절대로 미움 받는 일, 핍박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일에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인데 어떻게 내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수가 있지.

당연히 사람들이 나를 알아 줄 거라 생각합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다니는 사람, 성경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 예배당 청소 열심히 하는 사람, 십일조 빼 먹지 않고 내는 사람, 감사헌금 열심히 내는 사람, 헌금 열심히 하는 사람, 전도 열심히 하는 사람,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 인정해 주지 않으면 삐집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 본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삐져서 십자가를 만나면 되는데 삐져서 자신을 더 높여주는 곳을 찾아갑니다.

 

결국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자기 자신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자의 마지막이 이런 모습입니다.

모든 일에 오직 자기 자신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음식도 가려 먹고, 옆 사람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이 주님을 증거하는 말씀인데 나름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님 증거하는 말씀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변화시키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으로 보기 때문에 결국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누가복음2233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다닌 이유는 이런 목적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성령을 주셔서 진짜 주님과 함께 옥에, 죽는데 가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기쁨을 위해 목숨까지 내 놓겠다는 베드로를 주님은 주님의 기쁨을 위해 그 목숨을 취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결심을 주님은 주님의 일로 바꾸기 위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린 우리 나름대로 계산해서 말씀에 접근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로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것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만 전하도록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면서 모든 일에 오직 자신의 기쁨을 위해 행하는 자임이 드러나도록 하십니다.

 

우린 한 순간도 나의 기쁨을 위해 살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모든 일에 나의 기쁨을 위해 땀 흘리고, 잠도 덜 자고, 힘든 일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 주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우린 타인을 구원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구원받아야 할 자가 누굽니까?

나 자신입니다.

 

구원은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의 행함이 타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능력이 자기 백성만을 구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기 백성에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도록 상황을 그렇게 몰고 가십니다.

 

그래서 우린 오늘도 모든 일에 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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