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61

푸른 섬 2015. 12. 13. 15:34

 

권세 아래의 남자와 여자

고린도전서 112-10

오늘 본문에서는 전통이 나옵니다. 전통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신학공부를 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곧장 천주교를 떠올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전통을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오늘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에 속합니까 아니면 인간들이 만든 전통에 속합니까?

인간들이 만든 전통이라고 하면 간단하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 것 외에는 모두를 말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드린 제물과 제사는 전통에 속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속합니까?

아마 나름 개혁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할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성만찬은 열심히 행하면서 왜 이 말씀은 천주교처럼 지키지 않을까요?

이것 참 재미있는 말씀이잖아요. 예배드릴 때 짧은 여자들이 머리를 가리는 것을 덮어 쓰고 예배드리면 말씀대로 사는 것 같잖아요.

 

만일 천주교처럼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전통으로 본다면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성경말씀에 인간의 전통을 자꾸 가미 시키겠죠?

 

그런데 우리 교회를 한번 봅시다. 우린 우리의 전통이 없습니까?

열 한시에 모인다. 이건 인간의 전통입니까 아닙니까?

 

축도하거나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예배를 마친다는 것은 전통 아닙니까?

성경 어디에 예배 끝날 때 목사가 축도하라는 말이 있습니까?

 

그러면 예배 시간에 찬송가 부르는 것은, 한 곡 부르는 것, 두곡 부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설교 십오 분, 이십분, 삼십 분, 사십분, 오십분 이런 것은 어디에 속합니까?

 

이미 우린 인간의 전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린 전통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그 사회가 만들어 내는 사상과 관습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관습은 항상 사상을 담고 있지요. 사상 없는 관습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관습처럼 말입니다.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설교를 하면 그 머리인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이와 달리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기도나 설교를 하면 역시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들이 행하는 어떤 전통들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통을 무시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전통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천주교의 주장을 따라야 하겠지요.

그런데 왜 천주교의 주장을 거부합니까? 왜 우리는 인간의 전통을 거부한다고 합니까?

사실은 말 뿐입니다. 이렇게 말해놓고 똑 같이 인간의 전통을 하나님 말씀처럼 여깁니다.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고백 중 아주 탁월한 신앙고백서라고 합니다.

천주교의 전통을 비판하는 개혁주의 자들은 자신들의 전통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이단 취급합니다.

 

예를 들면 난 성경 말씀만이 오직 진리를 전한다고 하면 이단이 됩니다. 반드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인정해야 당신이 성경말씀만을 생명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은 인정하겠다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643-1647년에 영국에 있는 웨스트민스터회의에서 만들어 졌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데 이제는 웨스터민스트 신앙고백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믿음의 주인공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아니라 신앙고백을 하는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것조차 주님이 하게 하셨다라고 주장합니다마는 그렇다면 그 자리에 왜 신앙고백하는 자신이 부인 안 될까요?

 

이 신앙고백이 법규라는 것이 재미 있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역시 천주교가 주장하듯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도 이런 부류 중에 들어가잖아요.

 

하나님께서 어디에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여자는 머리에 덮어쓰고 남자는 덮어쓰지 말라는 것이 있습니까?

제사장이나 나실인의 경우 머리카락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말씀이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오늘 본문을 전통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의 영을 받은 사도 바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여기에서 전통이다 아니다를 나눈다는 것은 굉장히 교만한 짓입니다.

이렇게 나누겠다는 자체가 자신이 주님 말씀을 들어야 할 자가 아니라 자신이 주님 말씀을 판단할 자리에 있다는 말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우린 전통이다 아니다를 나누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우리가 보기엔 역시 율법이 하나 가미되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기도 할 때나 예언할 때, 즉 설교 할 때에 남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면 절대 안 되고 여자는 반드시 머리에 무엇을 덮어쓰고 해야 된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습보다 더 상위에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남자는 하나님이 형상과 영광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않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자들은 남자들 말 잘 들어라. 이것 아닙니다.

여자는 천사들의 권세 아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남자든 여자든 모두가 다 천사의 권세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린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 받았다고 하면 화낼 여성들이 많이 있지요.

페미니스터들이 그렇잖아요. 우린 독립적 인격을 갖고 있지 어떻게 남자를 위해 여자가 지음 받았느냐고 버럭 화를 낼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무식한 바울이 남성 중심적인 시각으로 말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런 분노가 튀어 나와야 하지요. 그래야만 그 사람이 천사의 권세, 즉 주님권세 아래 있는 자인지 아닌지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남자들이 이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을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인데 인간들은 자기 입장에서 자기 유리한데로 말씀을 골라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남자 여자가 평등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남자 여자라는 관계를 통해 주님과 주님께로부터 난 성도와의 관계를 하나의 전통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보게 되면 우리 당황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것을 묻겠다는 말씀 아닙니까?

 

오늘 본문을 그냥 예배시간에만 일어나는 일로만 봐 버리면 얼마나 쉽습니까?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덮어쓰고 기도하고 설교하면 되고, 남자는 머리 길게 기르지 않고 기도하고 설교하면 끝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머리에 무엇을 덮어쓰고 주님의 머리됨을 인정하느냐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느냐는 말입니다. 머리에 무엇을 덮어쓰니 자신이 의인이 되잖아요. 그러니 주님의 머리 되심을 인정할 길이 없어집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자신이 주님의 권세를 인정했는데 왜 십자가가 필요합니까?

 

이렇게 되니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의인들의 모임이 되어 버립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내용에서 주인공 스칼렛이 엄마와 동생이 장티푸스 병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그런데 한편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인 멜라니를 얼마나 원망하고 저주합니까? 왜 피티고모를 따라 메이콘으로 가지 않았을까.

 

자신의 위치를 모릅니다. 바람과 함께 왔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져야 하는 인생에서 어떤 흔적을 남기고 가야 하는 지를 모릅니다. 오직 내일 떠오르는 태양에 대한 희망으로만 살아가지요. 그러니 그 자리에서 무슨 죄인입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가 나오겠습니까?

 

자신의 필요를 채워달라고는 눈물 코물 흘리면서 기도하겠지만 진짜 나의 주님은, 나는 주님의 권세 아래서 그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임을 감사하는 기도를 하겠습니까?

 

세상에 왜 남자 여자만을 만들었지를 모릅니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채울 대상으로만 생각하지요.

소유하고 싶은 욕망.

 

사무엘 하 11장을 보면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뺏는 사건이 나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암몬과의 전쟁 중에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전쟁하고 있지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봤을 때 왕이 누군지 생각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죄를 사람들 앞에서 얼마든지 감추고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에게 휴가도 주고 여러 방법을 쓰다 안 되니 우리아를 계획적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죄라는 것이 누구 앞에서 죄입니까?

주님 앞에서 죄입니다.

사람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다윗의 문제는 죄라는 것은 반드시 주님 앞에서만 성립되는 죄임을 몰랐다는 것이 죄입니다.

다윗이 생각하는 죄란 사람들의 평가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자신의 권력으로 그 죄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진짜 죄는 주님의 왕 되심을 무시한 것이 죄입니다.

 

다윗의 눈에는 밧세바가 여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아 장군은 한 남자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지금 누가 다루시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나단선지자가 찾아 왔을 때 비로소 그는 밧세바와 우리아의 배후 권세자가 누군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주님의 피 흘리심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남자가 보일뿐이요 여자만 보일 뿐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곳에 남자 여자들이 있지요.

사람들은 주님께서 남자 여자를 만드신 이유가 진짜 남자는 주님밖에 없고 진짜 여자는 성도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이 땅에 남자 여자로 가득 채워놓았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권세가 따로 있다는 것이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이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덮어쓰지 않고 기도하고 설교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잘났다는 것이지요.

반대로 머리에 무엇을 덮어쓰고 기도하고 설교 하겠다는 것은 역시 나 잘났지요라는 것 밖에 안 됩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도 이 말씀대로 머리에 무엇을 덮어쓰지 않고 기도하고 설교 하겠다는 것은 자신이 왕의 자리에 서겠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설교를 보면서 왜 이렇게 성경을 왜곡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예수님을 전합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을 전합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을 전하는데 성경 말씀을 전통이냐 아니냐로 본다든가 아니면, 무엇을 행해야 된다 그렇지 않다로 해석하게 되면 성경 말씀을 율법으로 만드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우린 분명 전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남자가 바지 입고 여자는 치마 입고, 어떤 나라는 또 다르겠지요. 각 나라 마다 관습이 다릅니다. 그러나 남자 여자는 분명 구별됩니다. 남자 여자를 보면서 십자가 지신 주님의 권세를 보는 자가 성도입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이 남녀 배후에서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활동하고 계신가를 볼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주님은 주님의 피로 활동하시면서 주님의 주되심을 증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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