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63 분쟁

푸른 섬 2015. 12. 27. 16:05

 

분쟁

고린도전서1118-19

목사들을 만나보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분쟁하는 것은 싫다. 하나 되는 이야기를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좀 세밀하게 이야기 하면 싫어합니다. 모두 함께 갈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목사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과 만나보더라도 그들 입에서 복음이야기 듣기 힘듭니다. 분명 상대가 예수 믿는 사람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해서 그럴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 일까요?

 

교회마다 분쟁이 있습니다. 없는 곳이 없지요. 그 분쟁이 크든지 작든지 할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분쟁이 일어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분쟁이 일어나야 그 곳에서 주님으로부터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이 봄철에 파란 새싹이 돋아나듯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이 말씀 우리가 듣기에 상당히 거북한 말씀 아닙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셔서 그 피로 구원하셔서 교회로 부르셨다면 그 교회는 분쟁 없이 한마음 한 뜻이 되게 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그 정도의 능력은 있으시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처럼 말씀하시면 마치 주님이 분쟁을 조장하시는 분처럼 보이잖아요.

 

첫째 아담이 만든 하나님상은 분쟁을 만들어 내지 않는 하나님상입니다.

창세기11장을 보면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이 언어가 하나일 때 그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됨의 힘으로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구호를 외칩니다.

 

우리들이야 바벨탑 사건을 나쁘게 보기 때문에 이런 나쁜 놈들 하겠지만.

만일 지금 온 세계가 서로 평화롭게 하나 되어 살려고 모든 나라가 노력한다면 좋아하지 않을 사람 어디 있을까요?

 

바벨탑 쌓는 인간들에게 분열은 없잖아요.

가인을 넘어 노아 홍수심판을 지나 드디어 인간들이 철이 들었는지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서로 협력하여 하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이것을 그냥 놔두시지 않습니다.

분열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언어를 다르게 해서 서로 싸움을 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는 너무나 다른 하나님입니다.

 

성탄절이 지난 금요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신들을 위해서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오신 뜻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땅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이 땅은 누구 땅입니까?

인간들의 땅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땅입니까?

 

주님의 땅이지요. 인간들에게 임대를 준 땅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땅에 임대로 사는 인간들이 주님을 영접했습니까 하지 않았습니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로 이 땅에 오시니 이 땅이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이 두 패로 쫘 나누어 졌습니다.

 

한 쪽은 아기를 환영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아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아기 예수님을 환영하는 쪽은 밤에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너무나 친절하게,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 뿐만 아니라 천군 천사의 찬송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던 자들은 유대의 왕 헤롯과 대제사장, 백성의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자신들 자리를 위태롭게 하는 일입니다.

이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양치는 목자들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자들이지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뇨라는 질문에 이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입니다.

자신들의 자리 보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등장하기 전에는 이들의 본성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니 그들의 본성이 확 드러납니다.

 

우린 이런 질문을 가져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헤롯왕과 대제사장, 그리고 서기관들을 모두 예수님 편이 되게 해서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분답게 대접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만드셨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랐겠느냐라고 상상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상도 성경을 읽게 되면 다 무너져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쪼개기 위해서입니다.

쪼갠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천국갈 자와 지옥 갈자를 나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대해서 적개심을 일으키는 자와 예수님에 대해 나는 죄임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옵소서라고 하는 자들이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이 만유의 주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실 때 세상은 두 부류로 나누어졌습니다.

 

청세기를 보게 되면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갈라집니다.

우린 그 말씀을 보면 안타깝지 않습니까?

형이 좀 넓은 마음으로 동생을 품고가면 될 것을 왜 죽이기까지 하느냐 하지 않습니까?

 

나이 들어 부모가 돌아가시면 형제간에 재산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 동생은 형에게 요구하지요. 형이 형 답게 좀 양보해라. 그러면 형이 나는 형이니 내 몫을 챙기겠다고 하지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물론 지금은 동생도 형을 죽이지요.

 

그런데 그건 이 땅에 수준 낮은 사람들의 삶이고 가인과 아벨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마음을 좀 더 포용적인 사람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얼마든지 수용하는 사람 되게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요즘 이런 사람 많아요. 하나님보다 더 자비로운 사람들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상을 용납하지 않는데 어떤 목사는 우상을 용납해요. 어떤 중은 크리스마스라고 절간에도 트리를 만들어요.

 

트리 만드는 것이야 하나의 문화지만 그 사람들은 예수도 얼마든지 자신들이 품을 수 있다는 입장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 안 듭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너무 속 좁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세상을 볼 때 너무 편협하게 보는 것 같잖아요.

세상은 악하다. 의인은 없다. 어떤 인간의 선한 행위도 악하다.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 모두가 죄인이다.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하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

 

이렇게 보게 되면 도무지 세상에서 하는 일이라곤 의미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되어도, 의사가 되어도, 교사가 되어도, 목사가 되어도, 사장이 되어도, 회장이 되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죄가 된다면 세상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확 갈라 버립니다.

주 부류로 갈라 버립니다.

한 부류는 죄인으로 주님의 십자가만 전하게 하기 위해서 의미 없는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신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또 한 부류는 의미가 없으니 내 나름 의미 있는 인생한번 거창하게 만들어 보고 죽자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분쟁, 그리고 그 분쟁을 통해 누가 주님의 백성인가를 드러내시는 작업에 대해서는 관심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 분노를 냅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십자가만을 자랑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자랑하는 것은 그들의 삶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귀찮게 하는 주님의 일에 대해서 짜증냅니다.

 

마태복음13장을 보게 되면 여러 가지 천국 비유가 나옵니다.

처음 나오는 것인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우린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을 사람들이 받아 천국 백성되기를 소원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은 씨를 뿌리게 되니 오히려 그 땅의 속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천국 복음으로 인해 그 밭이 옥토인지, 길 가인지, 흙이 얇은 돌밭인지, 가시떨기가 가득한 밭인지가 드러납니다.

천국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자인지,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지는 자인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인지, 말씀을 듣고 깨달아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맺는 자인지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는 이미 갈라내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갈라내는 일에 있어서 어떤 인간의 개입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오직 말씀이 개입되니 그 말씀, 즉 복음이 선포 되니 그 복음이 일을 합니다.

 

그 복음으로 인해 한쪽은 복음을 사랑하는 자들이요 다른 한 쪽은 복음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로 쫙 분리됩니다.

 

또 한 비유는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가라지가 그 밭에 생겼다고 합니다.

주님이 뿌린 좋은 씨가 있고 원수가 뿌린 씨앗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보여 주는 것이 천국입니다. 우린 함께 섞여 있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면 함께 교회 다니면 다 천국 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오히려 원수가 심은 자들이 쏙쏙 고개를 내밀어야 천국이 어떤 천국인지를 제대로 보여 준 자라고 하십니다. 불사르는 가라지와 곳간에 들이는 곡식으로 분리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것은 이미 가라지의 등장으로 이 땅에서 미리 앞당겨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도 앞서 천국비유와 동일한 점은 이미 가라지와 알곡은 확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선 비유에서 희미한 부분을 더 명확하게 보여 주는 부분이 이 비유입니다.

 

문제는 어느 세력이 더 큰 가입니다.

간단하잖아요. 삼십 배 육십 배 백배 열매 맺는 옥토보다 어느 땅이 더 큽니까?

가라지가 많을까요 알곡이 많을까요? 당연히 가라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겨자씨 한 알 비유로, 가루 서 말 속에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옥토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라고 하니 우리 생각으로 확 눈에 보이는 확장을 말씀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전려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이야 카메라를 이십 년 동안 삼십 년 동안 녹화해서 아주 빠르게 돌리면 그 세월동안 나무가 어떻게 자라는지 다 볼 수 있지요. 가루 서 말 속에 넣어 부푸는 누룩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이렇게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맺는 옥토를 주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주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사도바울을 사용해서 구원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예상하고 기대할 수 없게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면서 이와 동시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주님께서 일을 하십니다.

 

이처럼 갈라져야만 예수님의 주되심이 드러납니다.

 

우리들 눈에는 그냥 분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분쟁을 없어야 교회답다고 생각하겠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예수님의 심판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 그 분쟁을 일으키시고 싸움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러니 분쟁이 일어나면 주님께서 일하심을 보시면 됩니다. 가라지와 알곡이 싸움을 하겠지요. 가라지는 이 땅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땅 것을 위해 싸움을 할 것입니다. 이와 달리 알곡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그 분의 주님 되심만을 자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 됨을 자랑할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누가 이기겠습니까? 성도가 집니다. 환난, 박해,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을 이길 사람 어디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가라지는 환난 없는 인생, 박해 없는 인생, 세상의 염려 없는 인생, 재물이 가득한 인생을 꿈꿉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공중권세 잡은 자가 쥐고 있는 카드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 속에서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요, 주님을 핍박하는 자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임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도의 자랑은 환난 핍박 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세상의 염려 없는 인생, 재물이 가득한, 세상 권세를 가진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자랑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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