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64 주님의 만찬과 나의 만찬

푸른 섬 2016. 1. 3. 21:12

 

주의 만찬과 나의 만찬

고린도전서 1120-29

23-25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 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2214-20절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이 새 언약은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라는 말씀에 너무 혹 하시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이 자신들을 위한 피 언약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도행전을 읽게 되면 너희를 위하여라고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위에 붓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위하여라는 전치사가 위에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위에 부어진 피 언약입니다. 이렇게 되면 피가 주도권을 갖게 됩니다.

 

누가복음 2447,48절을 봅시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서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하시니라

 

피동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의 증인이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라고 합니다.

인간이 받고 싶다고 해서 죄가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주시는 분에 의해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의 이름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의 이름, 즉 주님이 이렇게 하심을 증거하는 자들이 바로 위로부터 성령으로 입혀진 자들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의 피가 부어진 자들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심을 증거하는 자들이지 자신들이 말씀을 이루어내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마치 주님의 말씀을 전하여서 고린도 교회가 그 말씀을 기념하는 듯한 인상을 풍깁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런 절차를 밟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람이 전파하고 사람이 그 전파 받은 것을 지켜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복음이란 사람이 전파한 것이 아니요 사람이 그 말씀을 지킬 수 없음이 밝혀집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주님의 지시한 만찬, 즉 저녁식사를 주님의 말씀대로 함께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처음 먹을 때에는 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시간이 흐르니 이것도 식상합니다. 처음에도 주님께서 기념하라고 하신 저녁식사니 나름 주의도 하고 나름 다른 사람도 배려하면서 적당량을 가져와서 식사를 했겠지요.

 

그런데 그런 마음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이젠 본색을 드러냅니다. 자신들이 먹고 싶은 마음껏 먹습니다. 그러자 음식이 모자랍니다. 어떤 사람은 배고프고 어떤 사람은 취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교인들 중에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는데 가난한 자들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이 이런 행동을 했지요.

 

이런 내용을 보게 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만찬은 오늘날 교회나 성당에서 하는 성찬식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고린도 교인들이 무식해서 오늘날처럼 행하는 성찬식을 만들지 않았을까요? 지혜가 부족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 저녁식사 때 하신 것처럼 저녁을 먹고 마시면서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단순히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했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 즉 그들 위에 주님의 피가 부어졌음 차원에서의 저녁식사입니다.

 

이후 고린도전서를 좀 연구한 자들은 고린도전서11장에 나오는 이런 문제를 처음부터 차단하기 위해서 한 입에 쏙 들어가는 떡과 한 입에 쏙 들어가는 포도주 잔을 만들어 냅니다.

 

오늘 본문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으면 이런 식으로 주님의 저녁식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그들은 많이 먹는 자와 취하는 자, 배고픈 자를 발생시키지 않기 위해 그 근원을 싹둑 잘랐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를 없애버렸습니다.

 

고린도전서1133절에 나오는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는 말씀도 제거 해 버렸습니다.

 

마치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흡사합니다. 말씀을 주시면 그 말씀을 완벽히 지키는 방법으로 그 말씀 자체가 활동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저녁식사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제대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 먹으러 모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냥 떡 한 조각 포도주 한 잔 마시는 것으로 모이는 모임이 아닙니다.

 

진짜 저녁식사입니다. 주님이 기념하라고 하신 것은 저녁식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저녁식사를 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새 언약을 전하는 모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모이면 식사를 하잖아요. 점심 식사를 하지요. 그 점심식사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왜 그런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27-29절 말씀을 봅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지금 개신교나 천주교가 잘한 것 같잖아요. 무슨 말인고 하면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부분은 성찬식 때 뿐이다라는 사고를 심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일 주일날 성찬식이 있으면 목욕하고 텔레비전도 안보고, 나쁜 생각하지 않고 조심조심 합니다.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물론 일주일 전부터 할 수도 있겠지요.

 

나름 할 수 있는 만큼 해서 성찬식에 참여 합니다. 이게 뭡니까?

이게 바로 주의 몸과 피에 대해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주님이 언제 이렇게 하라고 했습니까?

우리 위에 피를 부으셔서 그 피를 전하는 자로 주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은 피를 덮어쓴 죄인의 모습이 아니라 피가 필요 없는 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나름 경건한데 무슨 주님의 피와 몸이 필요 합니까?

자신은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지 않는 자인데 주님의 죽으심이 왜 필요합니까?

 

그냥 구경꾼으로서 기념하면 되지요.

마치 이 땅에서 죽은 아버지 기일이 되면 기념하듯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기념하라는 말씀은 주님이 여전히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일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기념하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저녁식사로 주님의 피와 몸을 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떻게 보입니까?

자신들의 죄를 드러내면서 새언약을 전합니다.

 

목사들이 성찬식을 하면서 29절을 많이 언급합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그러니 이런 자가 있다면 성찬식에 참여하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주님이 왜 피를 흘렸습니까?

죄 때문에 흘렸잖아요. 그런데 피가 필요한 당사자는 빠지고 피가 필요 없는 자들만 성찬식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름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를 살피라고 하는데 어떻게 자기를 살핍니까?

어느 정도 살펴야 주님의 떡과 잔을 마실 수 있습니까?

 

그런 조건 되는 자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저녁에 새언약을 세우실 때 그 몸과 피를 누구위에 부어셨습니까?

죄인들 위에 부어셨습니다.

 

제자들이 자기를 살필 줄 알았습니까?

자기 밖에 모릅니다.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하고,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부자니까 부자 권리, 헌금 많이 했으니 그 권리를 행세하겠다는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는 이런 자들에게 부어졌습니다.

 

31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우리를 살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살필 수 있다면 왜 주님의 피가 부어져야 합니까?

 

왜 주님께서 새언약을 세우시겠습니까?

 

오늘날 교회나 성당에서 하는 성찬식은 새 언약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한다고 하지만 그야 말로 기념입니다. 실은 새 언약을 부인하는 성찬식입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은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대로 된 성찬식이고 식사라면 주님이 왜 피를 우리 위에 부으셨는지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찬식이라는 예식을 만들어 냄으로 말미암아 새언약이 우리 몸 위에 부어져서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곳에서 적용된다는 사실을 하나의 절차로 바꿔치기 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7장에 보면 예레미아가 여호와의 성전 문에 서서 여호와께 예배하러 그 문으로 들어오는 자들에게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누구 말이 거짓말입니까?

예레미아 선지자 말이 거짓말이잖아요. 성전 맞잖아요. 성전을 보고 성전 아니라고 하면 무엇을 보고 성전이라 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보시기엔 성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는 분명 성전이지만, 우리들이 보기엔 주님께서 기념하라고 하신 그 기념이지만 그 기념이 그 기념이 아닙니다.

 

그 성전이 그 성전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이 본문을 읽은 후대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고 성전에서 제사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지!

 

그래서 나온 자들이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눅가복음181112절을 봅시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제대로 기념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린 주님을 제대로 기념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 위에 주님의 피가 부어졌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피가 부어졌음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자가 새언약의 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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