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65 징계

푸른 섬 2016. 1. 17. 15:33

 

징계

고린도전서1132-34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저녁 식사 때 일어난 문제입니다.

어떻게 보면 별로 큰 문제도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음식조금 많이 먹었다고 이렇게 수천 년간 욕 얻어 먹을 일이냐 말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습니까?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이렇게 말씀으로 고정시켜버렸습니다.

말씀으로 고정시켜 버렸다는 말은 그들이 아무리 그 행실을 바꾼다 하더라도 여전히 너희는 죄인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오늘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나는 판단 받는 자가 되지 않을까를 연구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징계를 받지 않을까에 온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그래서 말씀 지키려고 노력하지요.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를 비웃습니다.

우리 모임에는 저런 경우가 없어라고 말입니다.

 

먹을 때 자신이 죄인입니다라고 해 버리면 문제가 없는 것을 먹을 때마다 난 말씀대로 살았지요. 난 기다렸지요. 난 가난한 자들 무시하지 않았지요. 그러니 난 징계 받지 않아도 되지요라는 것입니다.

 

만일 징계가 없다면 그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7절을 보면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이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양아들 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징계를 하십니다.

맏아들을 증거하기 위해 징계하십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가 지금 판단을 받고 징계를 받는 것은 오히려 아들임을, 성령 받은 자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밖에 모릅니다.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것은 자기 위부에 누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한발 한발 움직이고 무엇을 계획하고 무엇을 행하는 것 그 배후 누가 있는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면 기뻐하고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슬퍼하고 난리 법석을 떱니다.

 

이 세상이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만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래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게 뭐 어때서?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올 때 여인들이 대대적으로 노래하며 환영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여러분 이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녀가 시험을 쳤는데 다른 친구들은 백점을 맞았는데 내 아이면 50점이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화 나죠. 짜증나겠죠.

 

지금 왕이 누굽니까? 사울입니다. 사울이 왕인데 전쟁의 모든 영광을 왕에게 돌려야 하는데 다윗에게 돌리는 것은 사울 왕을 약 올리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사울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린다고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왕이 누굽니까?

 

사무엘상 8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사울 왕이 우리말로 좀 똑똑하다면 이 말씀을 기억해서 아하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런 꼴을 보이니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때 사무엘 선지자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구나 하면 될 것인데 그게 그렇게 안 됩니다.

 

안 되어야 하지요.

사울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해서 세운 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해서 세운 왕은 철저하게 여호와께서 왕 되심을 부정하는 왕의 역할을 하기 위해 세워진 왕입니다.

 

그래서 사울왕은 다윗의 승리를 여호와의 승리로 보지 않고 다윗 개인의 승리로, 그리고 지금까지의 전쟁의 승리의 원인을 자신의 승리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 왕만 그런 것이 아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는 누구밖에 보이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 눈에는 사람밖에 안 보이지요. 그러니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찬양합니까? 다윗을 찬양하지요.

 

이스라엘 왕이나 그 백성의 눈에는 여호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들이 지금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호와가 왕 되심을 거부하는 행동을 하는 것도 모릅니다.

 

이들에겐 오직 자신들의 삶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자기 자리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존심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206-9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아노니 그의 오른 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을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이 말씀을 읽어보면 사람들은 아마 미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전쟁할 때 병거나 말을 의지하지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공부할 때 나의 수고와 땀을 의지하지 누굴 믿고 의지하겠습니까?

 

사울의 입장이 우리 입장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자랑한다고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야 구약 성경을 알기 때문에 다윗이 이겼잖아요 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십자가 자랑한다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린 구약을 보면서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으니 지금 우리도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구원이란 다름 아닌 성공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자랑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십자가 자랑하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지 누가 구원받은 자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우린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하니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이제 세상에 나가면 무엇이든지 일등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고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디 그것이 그리 됩니까? 내가 원하는대로 절대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밥 먹여 주지 않잖아요. 그래서 사울 왕이 분노를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왜 사울 왕처럼 반응을 할까요?

왜 기도하면서 난 왜 다른 사람처럼 부자가 되지 못합니까? 왜 다른 자녀들처럼 공부를 못합니까? 왜 다른 사람처럼 건강하지 못합니까? 왜 다른 사람처럼 가정이 행복하지 못합니까?

 

지금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 하셨기에 승리한 삶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라고 우리에게 이런 일들을 일으키시는데 이것을 알지 못하니 감사가 되지 못하고 불만만 나옵니다.

 

성령께서 너는 죄인이야라는 것을 끊임없이 책망하시는데, 끊임없이 징계를 하시는데,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물들인데 그것이 사랑의 증거물이 아니라 나를 분노케 하는 증거물이 됩니다.

 

고린도 교회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면 분노를 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만 자랑하면 되는데 인간들은 칭찬받는 교회가 되고 싶어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나도 떳떳하다고 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사울을 보면서 우린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가르치지요.

주변의 사람이 잘 되더라도 참으시고 절대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더 좋은 자리로 인도할 것입니다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멘이 절로 나오지요.

 

어느 누가 사울 왕을 보면서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이렇게 사울 왕처럼 고정시키셨네요. 그렇습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 피를 제가 헛되게 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면 성경 읽는 맛이 안 나잖아요.

 

성경을 읽으면서 다윗처럼 승승장구하는 나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어느 누가 십자가를 보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성경을 덮어 버리지요. 복음 이야기는 하기 싫고 사람 이야기 하고 싶잖아요.

 

마태복음129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특이하게도 바리새인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질문을 한 것이지요.

안식일에 방 고치지 않는 것이 자신들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안식일 날 병 고친다면 우린 당신을 죽여 버리겠다는 계획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자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예수님을 죽일까의논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지키는 안식일은 자신들을 위한 것임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들통 났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조차 자신들 손안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과 생각이 맞지 않으니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들의 질문에 안식일엔 일하지 말라 했으니 일 하지 않았다면 바리새인들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등장은 이 땅이 왜 심판받아야 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줍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이 심판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눈에 안 보입니다.

이들은 얼마든지 예수님을 자신들이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앞에서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자 그것이 주님의 심판으로 보이지 않고 그냥 인간들이 행하는 안식일 위배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면 믿으면 되는데 문제는 믿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린 징계 받아 마땅해,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야.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우리를 오늘도 이렇게 징계하시네라고 하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기어코 나를 위해 이용하겠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내 손안에서 내 기도 안에서 놀아야만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그 배후에 마귀가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니 나도 그렇게 살 뿐이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부자가 사는 삶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부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혼도 없었고 재산이 많지만 형제들과 다툼 없이 얼마나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많았겠습니까?

성도의 눈에 이것이 지옥임이 보여야 합니다. 이 땅은 자기만 챙기는 땅입니다.

자기만을 위한 세상입니다.

 

그러니 거지 나사로가 부러울 수 없습니다.

천국은 가봐야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성령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늘 징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만 밝히 보이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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