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67

푸른 섬 2016. 8. 2. 16:16
은사와 성령
고린도전서12장4-11
오늘 같은 본문을 보게 되면 우린 또 우리의 욕망이 꿈틀대면서 나의 욕망을 채우려고 덤벼듭니다.
교회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나름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나타내심이 지혜의 말씀을, 지식의 말씀을, 믿음을, 병 고치는 은사를, 능력 행함을, 예언함을, 영들 분별함을, 각종 방언 말함을, 방언들 통역함을 은사로 주셨다고 합니다.

칼빈은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개개인이 가진 은사에 만족하며 그 은사를 최대한으로 개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여러분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지요.

교회라는 곳에 가면 언제나 들을 수 있는 말이잖아요.
심지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은사개발 운동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면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겠지요.

개혁주의교회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신사도운동과 칼빈의 주석의 차이점을 분간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야 신사도 운동이 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겠지만 이들이 벌이는 행태는 우리의 본능을 자극합니다.

지금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은사가 그대로 다 주어진다는 주장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마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당황스럽지요?
왜냐하면 이런 부분을 생각하는 것도 귀찮잖아요. 돈 벌고 살기 바쁘고 자식 키우기 바쁜데 이런 것 생각할 여력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이런 것들이 내 자녀와 관련 있고 내 남편과 관련 있고 내 사업과 관련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신사도 운동에 빠지는 이유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들이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은사는 성경의 권위에 종속된다고 주장합니다.
빠져 나갈 길을 다 마련해 놓았지요. 그러면서 예언의 은사는 지금도 계속된다고 주장합니다.

예언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합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주시는 것을 사람의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다-웨인 그루뎀
예언의 은사는 모인 사람들이나 그들 중의 소그룹이나 또는 개인에게, 신적인 기름부음은 받은
언어로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이다-데이빗 파이치
예언의 은사는 신적인 기름 부음을 받은 언어로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이다-피터 와그너
예언의 은사는 신자들을 권면하고 건덕하고 안위하고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를 표현하는 능력이다-로버트 클린턴

여러분들이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듭니까? 이들은 예언의 은사의 기능은 상황이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유익한 점은 힘들고 피곤하여 지쳐 있을 때 예언의 말씀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한다고 합니다. ‘많은 개인 문제가 해결되고 심령이 치유 받는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관점을 바꾼다.’고 합니다. 말이 맞는 것 같지요. 이 모든 것은 땅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문제 많은 아들에 대해 아들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책망하고 훈계하고, 기도 제목을 받고 목회 상담의 통찰력을 제공하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해 주고, 우리 마음을 시험하고, 우리를 인도하고, 영적 정찰무기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다 동의 되지 않습니까?
이런 예언의 은사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예언의 은사는 환상이나 꿈, 내적 음성, 계속 이어지는 말을 통해, 주시는 말씀의 기록이나 녹음을 통해서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우리들이 소망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지혜의 말씀은 순간적인 지혜로 어떻게를 말해 주고, 지식의 말씀은 정보로 무엇을 말해 준다고 한다. 지혜란 사람에게 말을 할 때 무엇을 어떻게 제대로 하면 상대가 굴복한다는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다.

영분별은 예언이 틀릴 수 있으니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은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예언은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되어서는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고, 예언은 이루어져야 하고, 성경 내용에 위배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사랑과 이웃 사랑이 증진되어야 하고, 뒷맛이 평안하고 기쁨이 오고, 분별하기 위해서는 두 세 명이 그 주제에 대해 분별해야 한다고 합니다.

들어 보니 좋은 말이지요.

이들이 성령의 은사를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면 이들이 왜 문제가 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성령의 기능을 반드시 언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들로 주님의 증인으로 만드셨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친히 이 말씀을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시게 되면 주님께서 친히 홀로 말씀을 다 이루셨음을 보여주게 됩니다.

은사란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령의 은사란 누구를 증거하는고 하면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주심이심을 증거합니다. 주님이 다 이루셨음을 증거합니다.

따라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에 대한 것들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선물들입니다.


따라서 이 선물, 은사는 인간이 찾고 싶어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개발하고 싶다고 해서 개발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의 일입니다. 그 목적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사복음서로 들어 가보면 이런 일들을 예수님이 친히 행하셨습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지혜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지혜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앞서 신사도 운동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바리새인의 물음을 분별하는 것을 지혜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지혜는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로 은사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성령 받지 않아도 가능한 일입니다. 책 많이 읽은 사람들이 지혜롭잖아요. 거기에 성령만 살짝 얹어 놓으면 성령이 주신 지혜의 은사가 되지요.

고린도 전서2장5절을 보면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4절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곧 성령과 성령의 만남만이 성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즉 사람의 지혜를 철저하게 부정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부정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지혜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는 자는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2장 8절을 보면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여기에 지식이 나오지요. 하나님의 영 외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아는 모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입니다.

믿음의 은사는 어떻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21-24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완전히 일방적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 병 고치는 은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지요. 앞서 지혜와 지식, 믿음이라는 것도 사복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지요.
그 병 고침이 어떤 결과물을 가져 왔습니까?

마태복음12장9-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손 마른 자를 고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 의논합니다. 어떻게가 여기에 나오지요. 그들의 지혜는 예수님을 죽이는 지혜입니다.

15절을 보면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병 고치신 목적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심판받을 자들은 예수님을 죽여라. 그 일로 이방인들이 소망을 얻게 될 것이다.

병 고치심의 목적을 개인적 탐욕으로 이해한 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의 사고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병 고친 사건은 바리새인들의 탐욕을 고발하시는 사건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들이 원하는 대로 안식일 날 병을 고치지 않으셨다면 바리새인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병 고치는 은사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자들이 성령 받은 사람들입니다.

능력 행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14장에서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제자들은 오히려 믿음 없는 자임이 들통 납니다.
이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이들의 눈에는 십자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능력 행함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더 감기게 만드는 능력 행함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 쫓아냈다고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8장을 28절 이하에서는 자신들에게 경제적 손실이 오니 예수님을 자신들 영역에서 쫓아냅니다.

이제 예언을 한번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예언하셨지요.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베드로는 닭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냥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증거하기 위한 예수님의 예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손을 필요치 않고 부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을 예언하셨지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대로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착착 이루어집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이미 십자가로 마감하셨다는 말입니다. 마감하신 내용을 사도들에게 적용시키시는 내용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21장에 전도자 빌립의 네 딸이 예언합니다.
바울의 앞날에 대한 예언이지요.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우리 같으면 피하라고 준 예언이라고 확신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예언은 십자가를 전하라고 준 예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는 말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더 이상 사도바울을 말리지 않습니다.

예언은 알아듣지 못하게 하거나 오해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 예언은 내가 살길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을 길을 알려 주는 예언이 됩니다. 왜냐하면 구약 예언의 말씀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와 전혀 상관없는 예언은 마귀의 예언입니다.
영들 분별함은 예수님께서 제대로 하셨지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인간들은 영을 분별한다고 하면 딱 보면 안다고 말합니다.

무당들이 그런 짓을 하지요. 성경에 보면 마귀들은 딱 보면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영들을 분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들 분별방법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십자가로 영을 분별하셨습니다.

십자가 지셨을 때 온 세상은 마귀의 종들임이 발각되었습니다.
십자가 지신다고 할 때 제자들을 짜증내고 싫어합니다. 베드로가 본모습을 드러내잖아요.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누가 믿을 자인지 아닌지를 미리 알고 구별해서 복음 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 같으면 영을 분별하니까 골라서 전도하려고 할 것입니다.
영들 분별하니 나에게 유리한대로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을 분별한다는 말은 곧 십자가 복음만 전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각종 방언 말함을, 이것은 분명 외국말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2장에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합니다.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 말함을 듣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큰 일이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때에는 통역이 필요 없었습니다. 각 나라 사람들이 각 나라 말로 알아들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 소리를 듣고 술 취했다고 하면서 조롱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조롱하는 이유는 말을 못 알아듣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방언 통역하는 은사의 이유가 있지요. 통역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습니다. 무엇을? 복음을.

제가 임으로 해석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12장4-7절을 보겠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유익하게 하려 한다는 말씀에 집중해 봅시다.
누구를 유익하게 한다는 말입니까?
나 아닙니다. 너 아닙니다.
우리 아닙니다.
주님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우리를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십자가 지신 주님만 증거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자신의 모임을 긍정하거나 자신을 긍정한다고 주장하는 성령은 다 마귀의 졸개들이 하는 짓들입니다.

신령한 것이란 이런 것입니다. 앞서 예를 든 신사도 운동 같은 자들은 사람들이 보기에 신령해 보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다니는 모습입니다. 이들에겐 십자가가 지혜가 아니요 지식이 아니요 믿음이 아니요 병 고침이 아니요 능력이 아니요 예언이 아니요 영들 분별함이 아니요 각종 방언 말함이 아니요 방언 통역이 아닙니다. 이들은 십자가 사역을 꽃피우게 하는 것은 성령의 외적 사역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는 급성장이라고 말합니다. 육으로 난 자들이기 때문에 육으로밖에 말씀을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확장을 성령의 사역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에게 주신 성령이 모든 은사는 자기 확장이 아니라 자기 부인이며 십자가만 증거 하라고 주신 은사들입니다. 사람 많이 모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은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만 주님의 관심은 자기 백성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시라고 전하라고 일관되게 몰아붙이십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로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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