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69

푸른 섬 2016. 8. 2. 16:17
내 몸은 내 것
고린도전서12장14-31

내 몸이 내 것입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환경은 누구 것입니까?
우린 기본적으로 내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늘의 별이든 해든 달이든 땅에 있는 무엇이든지 모두 다 나를 위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몇 일전 정월 대보름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정월 대보름에 달 떠오르는 구경 여러 번 했습니다.
동네 바깥쪽을 나가면 논이었기 때문에 저 멀리 낮은 산 위로 떠오르는 달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내 어른들도 그곳에 나와서 달뜨는 구경을 하는데 꼭 그 달을 보고 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만든 새해가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해는 자신을 축복해 주는 해가 되어야 된다고 우깁니다.

그래서 나무에 빌고 돌에 빌고 산에 빌고 그 무엇이 되었든지 모두가 다 자신을 위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이 나를 위해 있지 누구를 위해 있습니까?
제가 어릴 때 저희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가끔 하셨습니다.
겨울이 되면 산에 가서 마른 솔잎을 주어 옵니다. 그것을 깔비라고 하는데 그것을 아주 크게 원통모양으로 서너 개 준비하면 불쏘시개로 한 겨울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마련 나무도 준비해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온 방안이 따뜻해집니다.
그때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내 손이 내 딸이다.

내 손이 내 딸이다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내 손이 노력한 것이 내 딸 노릇한다는 말이지요.
주님의 수고가 아니라 내 수고가 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1장36절을 보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만물이 주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나로부터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해나 달이나 나무나 어떤 사람도 주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주님에 의해 움직입니다.
어느 것도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움직여지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누구신자를 증거하기 위해 모든 만물들을 주님께서 친히 움직이십니다.
내 몸조차 그렇습니다 .
내 몸에 붙어 있는 지체조차 그렇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주님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심은 오직 주님만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 어디에서 우리가 받을 영광, 우리에게 돌아올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4장10-11절에서 24장로들이 영광을 누구께만 돌립니까?
자신들이 쓴 관을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에게 돌려 드립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죽임당한 어린양을 위해 세상은 만들어졌고 과정이 이루어져서 결과는 죽임당한 어린양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를 보게 되면 에덴동산이 누구를 위해 있다고 생각합니까?
자신들을 위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뱀의 유혹을 받아 따먹었습니다.

에덴동산이 자신들의 세계라 생각한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가인 생각에는 아벨의 존재 이유가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한 놈 죽이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주변의 환경들이나 사람들 모두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자들이 가인의 후손이요 라멕에게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이들은 물로 심판당한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이 나를 위해 있고 땅이 나를 위해 있는데 물이 이 세상을 멸망 시킬 리 절대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면 자신들을 위해서 오시지 결코 자신들을 심판하기 위해 오신다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다고 합니다. 발, 손, 귀, 눈, 코등이 있지요.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몸의 지체 중 되고 싶은 것이 어느 부분이냐고 묻는다면 어느 부분이 되고 싶습니까?

제가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행하는 자,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말하는 것, 방언 통역하는 것 중 어느 은사를 갖고 싶습니까?

앞서 몸의 지체를 예를 들어 말한 것이 지금 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몸의 지체 모델이 적절한 모델입니까?

어떻습니까? 몸의 지체와 은사들은 다르지 않습니까?
몸의 지체는 반드시 있어야 되는 요소지만 은사는 반드시 없어도 되잖아요. 이것이 우리들 생각 아닙니까?

그런데 18절을 보면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그 몸에 두셨으니” 라고 합니다.
몸의 지체는 몸이 원해서 생긴 지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그 몸에 두셨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지체를 갖고 너희들 자식 잘 키우고 몸 잘 관리해서 잘 먹고 잘 살아 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근거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몸에 지체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는 사람들은 당장 이 말씀이 자신을 위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은사들이 있다. 그러나 그 은사가 각자 다르지만 서로 필요를 위해 주신 은사다. 그러니 내가 받은 은사를 갖고 형제들을 도와야 한다. 우리 서로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여러분 이런 교회 다니고 싶지 않습니까?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이해하고 채워주는 모임 그런 것을 주님이 원하는 교회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른 속뜻이 있습니다. 자신이 주인 노릇하고 싶다는 것을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이 넘치는 교회라 생각해서 교회를 찾아 갔지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당장 뛰쳐나갑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모임은 나로부터 삭제 해 버립니다.

복음을 아는 모임, 십자가의 은혜를 전하는 교회라면 이 말씀대로 살지 않을까 기대해서 찾아 가 보면 낙담만 할 따름이지요. 다른 점,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얼마 다니다가 뛰쳐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해 있어야 될 교회가 전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 근거하여 그 교회를 비교해보면 전혀 교회답지 않아요. 오히려 기존교회가 더 사랑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모두 가면놀이 하고 있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그런 곳이 더 맘이 끌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여전히 구약성경을 배우고 외우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마귀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도 말씀이 읽혀지지 않았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말씀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자신들을 더욱더 죄인 만든다는 사실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들이 상상하는 것은 오직 자신들을 위한 메시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오히려 자신들을 더욱더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라고 주신 말씀이요 그래서 그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 백성으로서 축복받는 삶을 살줄 알았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읽고 듣고, 나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와 같이 이 말씀을 읽고 해석합니다.
우린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린 십자가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각 지체에 대해 귀히 여기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모임이 되어야 그리스도의 몸을 증거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다고 하시는 25절 말씀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말씀을 사람들은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에 여러 지체들이 있지요. 분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한 번도 없지요. 분쟁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빈센트 반 고흐처럼 자기 귀를 잘라 버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잖아요. 너무나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있지요. 뿐만 아니라 서로 같이 돌보잖아요. 얼굴이 가려운데 손이 돌보기 귀찮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완전 자동이잖아요. 발은, 뇌는, 눈은 약국으로 함께 움직이잖아요. 누가 불평합니까? 어느 지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모임이 그럴 수 있습니까?
26절 봅시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 하느니라”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즐거워한다. 누가 고통 받으면 그건 너 고통이고, 누가 즐거워하면 그 즐거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아무 상관없잖아요.

우리 중 한 사람이 돈이 많다. 그러면 함께 즐거워할까요 아니면 시기할까요? 겉으로야 좋아할 것 같지만 속으로는 질투합니다. 시기 합니다. 우리들 자녀 중 누가 공부를 잘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냥 마음이 요동칩니다. 누가 병들어 누웠다. 연민만 느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침,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방언 통역이 나오지요. 인간들의 관심은 오늘날도 이런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집니다.
이것보다 웃기는 일이 없습니다.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이 왜 웃기는 이야기가 되느냐 하면 은사를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 즉 십자가지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은사를 주십니다.

그러니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를 우리가 따질 입장이 못 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세요?
우린 그것을 판단할 입장에 못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사용 하시는 대로 사용되어지는 자들인데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사용하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도 이런 은사가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자신이 주님의 자리에 않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한다는 25절 말씀에 근거하면 우린 다 말씀에 합당한 자들이 아님이 들통 납니다. 물론 자기가 받은 은사가 무엇일까 은사를 한번 개발해 볼까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지옥가야 할 자들임을 모릅니다.

앞서 지체 중 어느 부분이 되고 싶습니까라고 질문 드렸습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은사, 다르시는 은사, 각종 방언 말하는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인간의 탐욕은 주님이 주시는 은사 앞에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심지어 말씀을 자신들이 지켜보려 덤벼듭니다.

주님이 주신 은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 은사가 자신을 위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어느 은사를 갖고 싶습니까?
여기에 나오는 은사 중에 난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다는 사람 있습니까?
돈 벌기 바쁘면 관심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우리속의 죄가 드러납니다.
골라 골라 해서 골라 잡고 싶잖아요.

우리 몸은 우리 자신들만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들통 내십니다.

남의 고통이 내 고통 되는 일 없습니다. 남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남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내 고통, 내 영광밖에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런 자들임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들추어내시면서 십자가 사랑을 전하십니다.

그러니 교회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내가 소망하는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십자가의 피만을 증거하라고 죄가 드러나는 곳이 주님의 피로 세우신 교회입니다.
오늘도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을 마치 나로 인하고 나로 말미암고 나에게로 돌아와야만 한다고 우기는 이런 인생에게 십자가의 피로 찾아오신 주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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