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70

푸른 섬 2016. 8. 2. 16:17
사모하라
고린도전서12장31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주님께서 왜 사도바울을 통해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 하셨을까요?

창세가3장16절을 보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에 보면 ‘남편을 원하고’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이 이전 버전에서는 사모하고 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남편을 자기 손안에 넣고 싶어 환장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고 하면 야곱의 두 아내 라헬과 레아의 싸움에서 잘 나타납니다.
창세기29장3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참 말씀이 어렵습니다. 왜 어려운고 하면 누가 레아를 못 생기게 만들었습니까? 날 때부터 소경되게 하신 분이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시죠. 주님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이제 와서 레아가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아들 이름을 레아는 르우벤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이름 한번 거창하게 짓지요. 왜 이렇게 이름을 짓습니까? 남편 사랑 독차지 하기 위해서입니다. 남편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지요.
남편을 사모할 것이라는 말씀은 지키고자 해서 지키는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되어진 여자들이 증거물로 드러납니다.

이런 남편에 대한 소유욕이 야곱의 열두 아들이 됩니다.

레아가 둘째도 아들을 낳습니다. 그 이름이 시므온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아들도 주셨도다(33)”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은 레위입니다.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넷째 아들은 유다입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남편에게 사랑받더라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요.
언니를 시기합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아내가 이렇게 말하면 남편이 죽을 지경이겠지요.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사랑이 좀 이상하지요. 라헬이 야곱의 사랑을 받았다면 왜 야곱이 라헬의 말에 화를 낼까요?
그러자 라헬은 하나님을 대신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종 빌하를 통해 아들을 낳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빌하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이름이 단입니다.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빌하가 또 아들을 낳습니다. 그 이름이 납달리입니다.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그러자 레아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요.
언니 레아도 종 실바를 통해 아들을 낳게 합니다. 이름이 갖입니다.
“복되도다”

실바가 또 아들을 낳습니다. 이름이 아셀입니다.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그리도 다시 레아가 아들을 낳습니다. 잇사갈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레아가 여섯째 아들을 낳습니다. 그 이름이 스불론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그 후 딸 디나도 낳았습니다. 딸은 의미 없습니다.

그리고 라헬이 아들을 낳습니다. 이름이 요셉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이처럼 창세기 3장16절 말씀이 여자는 남편을 사모할 것이라는 말씀, 최근 번역에서는 남편을 원한다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어떻게 번역하나 여자는 남편을 자기 소유로 삼고 싶어하는 유전자가 여자의 몸 속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사모한다는 것이 독특하게도 남편 사랑 독차지 하기입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이 말씀이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지요? 그런데 시대가 바뀐다고 할지라도 남편와 아내와의 관계에서는 여자가 드러내는 속성은 남편 사랑 독차지 하기입니다.

길가다가 잠시 한눈을 팔아도 가만 아내가 가만있지 않지요. 드라마에 나오는 여배우와 자신과 비교하는 것도 용납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남편을 사모하는 여자로 만드셨을까요?

창세기3장16절을 보면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고 하십니다.
요즘 여자들 같으면 이 말씀에 두 손들고 반대할 것입니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감히 남편이 아내를 다스린다고.’

창세기 3장16절 말씀이 우리들 눈에는, 이 세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눈에는 저주로밖에 안 보입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의 자리 다툼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창세기3장15절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원수관계,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뱀은 그 후손이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 말씀을 여기에 쏙 집어 넣게 되면 3장16절이 어떤 의미를 담게 되겠습니까?

에베소서5장22-23절을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창세기 3장 16절 말씀은 이 말씀을 품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 말씀이 창세기 3장16절 말씀을 품고 있지요.


그러나 문제는 이 말씀에 순종할 인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겠습니까?
어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겠습니까? 목숨을 내어 놓고 말입니다.

성경에는 독특하게도 여자를 차지 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어 놓는 남자가 있어도 아내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지요. 이 땅에 남편 같은 남편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남편을 주라 칭하였던 여자는 등장해도 아내를 사랑했던 남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분명 신약성경에서 솔로몬을 남편의 예로 들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3장 5-6절입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사라가 아브람이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 자신을 누이라 속여 바로의 궁으로 이끌려 간 일을 생각해 보세요. 어떠 했겠습니까?

우리가 볼 때에는 세상에도 이런 일들이 많이 있잖아요. 남편을 위해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는 여인들이 한 둘입니까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을 위해 남편을 주로 따르지만 사라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증거하기 위해 남편을 주라 칭했습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이야기냐 하겠지요. 예를 들면 구제를 누구나가 다 하잖아요.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과 다른 이방 나라가 그렇게 하는 것은 다릅니다. 한 쪽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증거하는 쪽이고 다른 한 쪽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행위입니다.

지금도 그렇잖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것과 믿지 않는 자들이 사는 것을 보면 외부적으로 보면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 보아도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가 있었다면 바로 왕이 알아 차렸겠지요. 그런데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절대 알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사라가 아브람을 주로 칭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라가 늘 주로 섬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라의 행동은 그냥 그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다른 여인과 별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문제는 야곱의 아내들을 통해 드러난 여자의 남자 사랑 독차지 하기는 결국 자신을 위한 사랑임이 드러납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개입하고 개시다는 사실이며 또한 그 과정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펼치는 하나님 말씀의 실제화는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실제화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참 남편 되시고 그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참 신부로 드러납니다.

남편을 사모하고 여자를 다스리는 것이 첫째 아담 안에서는 자기탐욕을 위한 말씀의 실제화입니다. 그러나 그 바탕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그 말씀의 참 의미가 밝혀집니다.

결국 지상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역할은 말씀 앞에서 말씀대로 남편 역할 못했다, 아내 역할 못했다로 드러납니다.
이 바탕에서 참 남편이신 십자가 지신 주님이 참 신부인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남편과 아내가 이 세상 안에 있다는 이유는 참 남편이 누구면 그 남편이 만든 아내가 어떤 자들인지를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 남편과 아내를 두셨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구약적 말씀을 근거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 앞에 우리는 우리의 사모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로 드러납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아 홍해를 건넌 자들에게 창세기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창세기 3장16절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우린 그런 죄인입니다라는 태도일까요 아니면 아내는 내 소유가 아니요 남편도 내 소유가 아니다라고 말씀을 적용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러니 아내에 대한 태도는 주 행세 하기 바쁜 것입니다. 이혼하는데 식은 죽 먹기잖아요. 여기에 당하는 아내는 그럼 남편을 주로 생각해서 따랐을까요? 아닙니다. 지금 아내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잖아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셨을 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고린도 교회성도들은 은사에 대해 열렬히 사모하고 있는 자들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셨지요.

문제는 이 말씀을 누가 이루십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이 이루십니다. 그러면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피로 세우신 교회가 어떠한 모습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 말씀에 근거해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려고 덤벼 덥니다. 물론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물론 사랑도 자기 소유로 생각합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더 큰 은사를 가지려고 발악을 합니다.

로마서5장20절을 보면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하십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의 시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증거해도 그들은 그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들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자신들이 그 말씀을 믿으려고 하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도 자신이 사모해서 더 큰 은사를 뽑아 내려고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눈에는 이 말씀이 이것도 보이면서 동시에 은사라는 것이 오히려, 사모하라는 말씀이 오히려 십자가 지신 주님만이 이루시는 말씀임을, 은사가 오히려 가짜를 들추어내는 기능을 하는 성령의 은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담 같은 속성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모든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요한복음 5장 39절 말씀이 이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8장19절에 보면 한 서기관이 나옵니다. 그 서기관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기적들을 보니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 뒷 구절을 모른다면 우린 이렇게 생각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들었고 능력도 보았으니 예수님께서 그를 환영했을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니라(마8:20).”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가 원해서 따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자신이 원하는 자들을 따르게 하시지 너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았다고 해서 너 결심으로 따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자 중 또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을 하셔야 할까요?
그래 지금까지 나를 따른다고 고생했다. 그러니 잠시 너 아버지를 장사하고 나를 따라도 된다. 삼일 휴가 줄게. 이렇게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결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의 불가능성을 사람들 앞에 터지는 지뢰처럼 앞에 펼쳐 놓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이 만드시지 인간이 읽고 듣고 보아 깨달아 결심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더 큰 은사를 사모함은 주님과 영원히 가까워 질수 없는 평행선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모함은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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