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72

푸른 섬 2016. 8. 2. 16:18

사랑은 오래 참고
고린도전서13장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지난주에는 사랑이 없으면 어떤 은사가 있어도 그 은사는 쓰레기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은사의 역할이 오히려 은사 받은 자가 쓰레기차임을 드러내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반감을 가질 분들이 있겠지요? 어떻게 십자가 지신 주님이 주신 은사인데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이 쓰레기차인가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이미 십자가 안에서 들통 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모든 인간이 소각장으로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소각장은 고통과 괴로움은 주지만 태워지지 않는 소각장이지요.

그러면 성도가 지옥 간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성령은 창세전에 계획한대로 자기 백성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기 때문에 결코 중간에 취소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린 당장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 취소되지 않는다면 왜 고린도 교회가 문제가 생깁니까?
취소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고린도 교회가 더욱더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 생각하지요. 그래. 문제 있는 고린도 교회를 바꾸어서 제대로 된 교회가 되게 해서 천국 데려 가시려고 지금 사도 바울을 통해 책망하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 구약과 신약이 다른 점이 있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한 야곱의 자손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의 기준에 의해 이스라엘은 멸망당했습니다. 심지어 죄용서 하는 성전이 있어도 멸망당했습니다.

신명기8장19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고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아 너희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 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 (신11:18-10) 고 하셨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결국 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멸망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우린 이렇게 살지 않잖아요. 성경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는 것은 잊어버리기 쉬우니까 늘 각성하라고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아침에 거울 볼 때마다 말씀을 보게 되지요.
앉아 있거나 길 갈 때나 일할 때나 밥할 때나 화장실을 갈 때나 시험 칠 때나 언제든지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명했습니다.

집 문을 드나들 때마다 말씀과 부딪힙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익숙해지면 그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습니다.

우리도 그렇지요. 십자가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얼마나 가슴 벅차고 말씀을 알고 싶어 하고 했습니까?
그런데 그게 얼마나 갑니까?
이것은 이스라엘을 욕할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문제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설명하는 중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는데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면 신약, 즉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들과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구약과 신약이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린 성령을 받았으니 구약 백성과 달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달리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합니까?
고린도 전서만 보더라도 뭔가 바꾸라고 계속해서 말씀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거짓 사랑하지 말로 참 사랑을 행하라는 말씀을 들리지 않습니까?

은사란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있는 것이니 부디 은사를 받거든 사랑으로 은사를 행세하라고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만일 성경말씀이 이렇게 읽혀지지 않는다면 성경 읽을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의 변화를 주지 못하는 성경이라면 성경 읽을 이유가 없잖아요.

여러분들이 성경을 안 읽는 이유가 그런 것 아닙니까?

분명 요한복음 5장39절에서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다고 했으면 예수님을 알아가기 위해 말씀을 배우고 읽게 되는 것인데,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은, 즉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는 것은 별로 즐겁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것은 아담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전혀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자아주체가 무엇을 행할 때 보람을 느낍니다.

자신에게 무엇인가 쌓여질 때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손들이 만들어 내는 것들이 찬란한 문화들이잖아요.

심리적인 것이 되었든지 아니면 물질적인 것이 되었든지 나 자신을 든든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면 싫습니다.

그래서 뉴스를 보더라도 내 맘에 안 들면 채널을 돌려버립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이지요.
여러분 드라마에 나오는 악역들 보고 싶습니까 아니면 그것들이 벌 받는 것을 보고 싶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씀하시면 우린 내가 챙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합니다.
십자가 사랑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함께 죽었고 다시 주님과 함께 주님이 내 안에 사신다는 사실은 이 말씀 앞에서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내가 오래 참았는가? 내가 뭘 못 참았지. 고린도 교회 문제점을 근거로 생각해 보면 내가 은사 받았다고 너무 까불었구나. 좀 참았어야 했는데. 그래야 온전한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데. 남이 나를 무시해도 좀 참았어야 했는데 왜 분을 내었을까?

사실 이런 생각은 자기 챙기기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신이 한스러운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살았다면 사람들이 모두 나를 인정하고 칭찬해 줄 것이데 왜 참지 못해서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보도록 만든 것에 대한 반성이지요.

성도의 몸은 십자가를 전하기 위해 사용되어지는 몸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도가 살아가고 행동하는 모든 것, 즉 성령을 받은 자의 삶을 누가 조장해 내시는고 하면 십자가 지신 주님이 조장해 내는 삶입니다.

내안에 주님이 산다고 사도바울이 고배했지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삶을 사도바울의 삶이 아니라 주님의 삶이 되지요. 이렇게 말하면 또 오해합니다. 주님의 삶이기에 바르게 살아야 되고 말씀대로 살아야 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삶이라는 말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행하셨던 모든 것이 십자가를 증거한 삶이었잖아요. 그 십자가에서 언약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증거하는 삶을 성도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린 또 골라잡으려고 합니다. 어떤 것이 주님의 삶이고 어떤 것이 내가 산 삶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걸 골라낼 능력이나 있습니까?

능력도 없으면서 골라내 보려고 안달입니다. 그래서 자기기준을 설정합니다. 자기 체면을 겁니다.
이것은 내가 했고 저것은 주님이 했고.

백날 해봐야 자기기만입니다.

성도의 몸은 주님과 함께 죽었고 주님이 내 안에 사신다는 것을 통째로 보여주는 몸입니다.

즉 십자가의 피만을 증거하는 몸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은 주님이 하셨으니 주님이 이루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주님의 피로 죄가 용서되었다라고 하면 그 말씀을 믿지요. 그런데 어떻게 용서되었습니까?
여러분 확인해 봤습니까?
확인 안돼요. 주님의 말씀이 믿어진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사랑은 오래 참고’ 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셨고 그 이루셨음을 증거하는 차원에서 성도 가운데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드러나게 하시는 방식은 오래 참는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여러분 생각할 때 주님은 오래 참으셨습니까 아닙니까?
물론 성경에서는 오래 참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린 반문할 수 있지요. 오래 참으셨다면 끝까지 오래 참으셔야지 왜 참지 못하고 하늘에서 아들이 내려와서 심판을 감해 하시려고 하느냐 말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말은 영원히 오래 참아야 오래 참은 것 아닙니까?
열 시간, 일 년 십년을 백사십구 년을 참았다고 그 다음에 참지 못하면 오래 참은 것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알아서 가겠다는데 왜 부르느냐고 짜증 내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못 참아 주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오래 참은 것이 안 되잖아요.

베드로후서3장9절을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 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말씀에서 너희는 누구에 해당됩니까?
회개하기에 이른 자들만이 해당되지요. 그런데 회개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오래 참음이 결코 오래 참음이 아닙니다.
부자가 지옥 갔을 때 느끼는 그 느낌, 주님께서 오래 참으셨다는 느낌일까요 아닐까요?
절대 오래 참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짜 오래 참는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천국가기까지 오래 참아야 제대로 오래 참은 것이 됩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생각하는 오래 참음이란 결국 자기를 위한 오래 참음밖에 안 됩니다.
우리 딸은 제발 천국갈 수 있게 주님 오래오래 참아 주세요. 우리 남편이 천국 갈 수 있게 오래 오래 참아 주세요. 우리 엄마, 아빠가 천국 갈 수 있게 오래 오래 참아주세요.

결국 자신과 관련된 것을 위해서 주님의 오래 참음을 요구하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갖고 있는 본성입니다. 어느 누가 자신의 딸이 대문 이가 부러지기를 바라겠습니까? 그것도 유치가 아니고 영구치를 말입니다.
유치 부러진 딸도 있는데.

제발 남들은 교통사고 나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있더라도 내 가족만은 그렇지 않기를 늘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주님의 오래 참음이지요.

그런데 주님의 오래 참음이라는 것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마태복음3장을 보면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세례요한이 외친 천국은 우리들이 기대하는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심판의 천국이었습니다.

심판한다는 말은 심판 받을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 이유는 하늘에서 방문하신 아들의 죽음으로 드러났습니다.
아들의 방문으로 인하여서 이 세상은 심판받아 마땅함이 밝혀집니다.

심판하기 위해 오래 참으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한 자들은 이 말씀 속에 속한 자들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오래 참으심은 주님의 인내심이 얼마나 대단하신가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오래 참으심입니다.

로마서3장25절을 봅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 하셨다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은 무엇을 내포하고 있습니까?
화목제물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앞서 본 베드로 전서3장 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제물로 인한 죄용서가 길이 참으심에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이 최종적 목적은 주님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주님만 영광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이 생각하는 ‘오래 참는 사랑’에는 주님의 대신 죽으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구원, 자신들의 행복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자에게서 나오는 오래 참음은 주님의 대신 죽음을 전합니다. 내 구원, 내 행복이, 내 위신 세움이 오래 참음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 입에서는 자신이 오래 참았다는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대신 죽으심, 십자가를 전합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전하라고 주님께서 성도에게 오래 참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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