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74

푸른 섬 2016. 8. 2. 16:19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13장 4절
여기에 나오는 ‘시기’라는 단어는 질투라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 의미에는 불타오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미있지요. 제가 이렇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시기와 질투는 불타오르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요. 불타오르면 그 불이 어떤 역할을 하겠습니까?

시기의 대상, 질투의 대상을 불로 사 질러 버려야 시기나 질투가 멈추겠지요.

그런데 정말 성경말씀을 읽을수록 성경말씀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분명 은사를 언급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은사와 은사의 비교에서 오는 시기질투를 언급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이것을 확대 적용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교회라는 집단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초대교회 아닙니까?
어떤 사람들이 늘 주장하는 것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데 돌아 가봐야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선택적 지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골프 치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골프 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항상 자신이 잘 쳤던 것만 기억하고 말한데요.

그저께 텔레비전에서 어떤 국회의원 출신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소속으로 아니면 국회의원 후보로 나선 사람 치고 자신이 당선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좋은 말 했는 사람들 말만 기억하기 때문이레요. 이 사람도 국회의원 선거 나가서 떨어졌데요. 그런데 왜 나갔느냐고 질문하면 이런 말을 한답니다.

이것이 이런 사람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이미 선택적 지각을 하도록 살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자신이 죽는 자리는 절대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그것이 자신을 유익하게 하는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꿈자리가 뒤쑹쑹하다고 하면 그것도 자기를 위한 것으로 해석하고, 점을 쳐 나쁜 소리 들어도 그것도 다 자기 잘 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 성경말씀이 자신의 유익을 위한 말씀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라고 말하면 이미 우린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정해져 있습니다.
난 남과 비교하는 자, 시기하는 자다. 그런데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 하니 시기하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이제부터 시기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시기란, 질투란 불처럼 타오릅니다. 이것은 내가 불을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입니다. 나의 비교대상을 만나는 순간 내가 끌 수 없는 불이 됩니다. 그러니 우린 시기의 노예입니다.

가인의 성질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못 봅니다.
누구든 나를 건드리면 라멕처럼 죽여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냥 월급 받고 회사 다닐 때는 아무 생각 없다가 동료 월급액수가 나보다 많은 것을 아는 순간 그냥 미워집니다. 그냥 짜증납니다.

남들이 비싼 차를 타고 다니면 그려러니 하다가 나의 친한 친구가 비싼 차를 구입하면 기분 나쁩니다. 물론 자신이 더 좋은 차 있으면 별 생각이 없겠지만.

젤로가 전 자동입니다. 젤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시기라는 말입니다. 꼭 절로라는 발음과 비슷하네요.

그런데 성경은 독특하게도 이 젤로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출애굽기20장5절을 보면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참 무슨 이런 하나님이 다 있습니까?
이 성경구절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 안 믿겠다고 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압니다.

하나님이 쩨쩨하게 무슨 질투나 하고, 그것도 계집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우리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은 절대 질투하지 않는 우상 하나님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질투한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질투하시는 분 인줄 알고 계십니까?
인간들이 찾는 예수는 절대로 질투하면 안 됩니다.

베풀어 주고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끊임없지 지지해 주는 예수여야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질투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도 역시 질투하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먼저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질투하는 예수님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너희 인간들은 질투할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하는 질투는 결국 너 자신이 예수며 하나님이라는 것을 표출해해는 행동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그 하나님은 질투심이 불같이 타오르는 분입니다.

출애굽기34장15절을 보면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 별명이 질투의 하나님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그 질투심으로 그들을 심판하셔서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대사장들과 장로들이 시기가 나서 예수님을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마태복음27장18절입니다.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참 재미있지 않습니다. 본디로 빌라도가 보기에도 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시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구도 참여합니까?
본디오 빌라도도 참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본래 시기 질투의 소유는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소유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소유하는 순간 그 인간은 예수님을 죽이는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너를 위하여 세긴 우상에 대한 질투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시기 질투가 일어난다는 말은 나만 믿어야지, 나만 인정해야 하는데 왜 너는 나만을 인정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왜 나 외에 다른 것들을 섬기느냐 이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우상화 한 모습이 바로 시기의 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왜 심판을 행세하십니까?
우리가 사 복음서를 보기에는 심판을 행하시는 것 같지 않지요.

어떤 분이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시기는 하냐라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례요한의 증거와 그의 태도를 이야기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면서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너무나 궁금한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 맞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마태복음11장5,6절입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예수님의 답변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어떻게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 모습입니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이런 행위들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세례요한조차도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우리가 할 질문들을 우리를 대표해서 미리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린 주님의 천국복음 전파가 곧 심판임을 알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심을 믿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심판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질투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들만을 믿기 때문에, 우상 숭배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질투의 대상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은 이 땅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들 어느 누구도 아들 행세하지 못했고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질투의 대상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질투의 대상입니다.

그러면 세리와 창기는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자기 병 고치려고 다윗의 자손을 외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런 죄인들을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고 주님의 질투를 대신 받으셔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구원받는 자에겐 주님의 질투, 시기가 자기 몸에 베여 있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피가 흘러넘친다는 말입니다.

즉 이 말은 다시는 시기하지 않는 자가 된다. 질투하지 않는 자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의 피는 일회용이 됩니다.

일회용 컵 많이 사용하잖아요. 믹스커피는 일회용 종이컵에 마셔야 제 맛이 나잖아요.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도 일회용이만 족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를 믿고 나는 더 이상 주님의 질투를 야기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나는 더 이상 시기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지, 질투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지 결심에 결심을 하면서 스스로 속이지요.

그런데 마음속에 있는 시기 질투가 철철 흘러넘치는데 어느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만 믿으라고, 십자가만 증거하라고 시기 질투가 흘러나오도록 하셨음을 믿으면 되는데 자신을 자꾸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즉 자기 자신만을 믿는 모습입니다.

성령을 주셨으면 그것도 은사를 각자 다른 것으로 주셨으면 시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하셔야 하나님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이 만든 우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히려 성령을 통해 주님만 증거하라고 주신 은사를 통해 시기를 유발시킴으로 말미암아 주님만 증거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임을 증거하십니다.

그러니 시기 하세요. 마음껏 질투하세요. 물론 제가 하라고 해서 할 사람도 없습니다 마는 하지 말라고 해서 안할 인간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셔서 주님의 피만을 증거하십니다. 우린 여기에 이용되는 즐거움으로 살면 됩니다. 그러면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주님처럼 시기 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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