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76

푸른 섬 2016. 8. 2. 16:20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장4절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만이란 잘난 체 하는 태도로 겸손함이 없이 건방진 태도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만이라는 것은 사람을 향한 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26장18-20절을 보면
“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내가 너희의 세력으로 말미암은 교만을 꺾고 너희의 하늘을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을 놋과 같게 하리니 너희의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언약배반이 교만입니다. 출애굽기 18장을 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

이스라엘이 어떻게 행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해 어떻게 행했느냐가 교만인지 아닌지를 말합니다.

실상 창세기12장3절에 보면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무슨 이런 법칙이 있습니까? 아브람에 대해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의 선한 행위는 소용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내가 악한 일을 행해도 아브람에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결정되기 때문에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축복과 저주는 상관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이 복음이지요. 예수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축복을 받을지 저주가 받을지 결정이 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를 합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면 축복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니 그럼 내가 축복받으려면 아브람만 축복하면 되겠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이 받는 축복의 과정을 보면 아브람의 행위결정과는 아무런 관련 없음이 드러납니다.

야곱을 살펴봐도 그렇고 요셉을 봐도 그렇습니다.
야곱은 이름 그대로 약탈자 인생을 살아 누가 보아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자의 외연을 갖춥니다. 야곱은 그것이 축복이라 생각했지요. 그러나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싸워 이긴 후 울며 간구함으로 그의 축복개념은 바뀝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것이 축복임을 알게 됩니다. 즉 평생 죄인임을 드러내면서 그 죄인을 사용해서 여호와의 전쟁을 펼치시는 도구로 살아가는 것이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앞서 약탈자의 모습으로 산 것 자체도 어디에 포함됩니까? 그 자체가 축복이었습니다.
참 어렵지요. 처음에는 야곱이 축복을 잘못 이해했다고 해 놓고 이제 와서 그것이 축복이었다고 하니 뭔가 논리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이것은 마치 아브람이 자신의 아내를 속인 행위 자체가 축복 속에 담겨 있는 행위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미 태어나지 전부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신다는 여호와의 말씀에 근거되어 각자의 삶의 장이 펼쳐진 것입니다. 물론 야곱이나 에서는 이것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적용할 뿐입니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의 차이는 어디에서 나는고 하면 하나님과 만나 자신의 죽음을 경험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서 갈려 집니다.

에서는 특별이 나쁜 사람 아닙니다. 그냥 장자로 태어나 장자 행세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감히 장자의 명분을 뺏으려고 한 야곱을 죽이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장자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는 그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장 속에 놓여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자는 무엇을 해도 사랑 안에 있는 자입니다. 미움 안에 있는 자는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은 미움 받을 짓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을 내가 축복해서 내가 축복을 받아 내겠다는 것 자체가 만일 그가 사랑 밖에 있으면 그 자체로 미움 받는 자의 행위일 뿐입니다.
야곱 자체가 그의 행위와 관련 없이 사랑받는 자였다면 내가 축복하고 내가 저주하는 그 행위조차 축복받고 저주 받는 것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 아브람이 뭔가 특별한 사람임을 알았지요. 그래서 사래와 함께 아브람에게 제공한 물품들을 모두 아브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바로 집안의 문제가 해결되었겠지요. 그렇다면 바로 왕이 이제 축복 안에 들어 온 것입니까?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이 없으면 이제 더 이상 저주받는 자가 아니라 축복받는 자가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저주받는 자, 미움 받는 자의 장(field)에서 행한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의 집안에 재앙이 없다고 해서 이제 저주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저주의 장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에게 축복을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 하신다는 말씀은 아브람이 장차 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증거하는 자로서의 장에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내가 아브람을 축복하면 축복받을 수 있습니까?’ 에 있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얻을 수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행16:31)고 하셨으니 이 말씀대로 내가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이 말씀대로 주예수를 믿겠습니다. 그러니 나 이제 구원받았지요. 이런 식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주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구원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즉 주 예수를 믿는 것이 주님이 자신의 피로 죄를 용서하시고 믿게 하시는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이 말씀을 친히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17장 28절을 보면 다윗의 큰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노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큰형 엘리압이 다윗을 볼 때에는 다윗이 교만함과 완악하게 보일 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주에게 잘난체 하며 건방진 태도로 밖에 안보입니다. 자신은 정말 목숨 걸고 블레셋과 싸움을 하고 있는데 다윗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윗은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장군 가드 사람 골리앗을 죽여 하나님의 군대를 다시는 모욕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누가 보아도 다윗의 이 말은 큰 형 엘리압의 말대로 교만하고 완악한 말일 뿐입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싸울 사람이 없으니 사울 왕이 다윗을 내 보내는데 문제는 그에게 맞는 갑옷이나 투구나 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전쟁에는 손에 막대기와 매끄러운 돌,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과 싸움을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듯이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여기에서 엘리압이 생각하는 교만과 다윗의 믿음이 비교됩니다.
도대체 누가 교만한 자입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기 때문에 엘리압이 교만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다윗의 말 속에 이 전쟁은 이미 골리앗을 이기고 승리했음이 담겨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레위기26장18절 이하에 나오는 교만하지 않는 언약을 배반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큰형 엘리압은 그 당시 자신이 사용하는 용어로 교만하다고 다윗에게 노를 발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고 방식 자체가 바로 언약 배반 행위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금 어떤 장에 놓여 있는지를 모르고 무조건 자신의 열심과 능력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주님 앞에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 나셨을 때 헤롯왕이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죽이려고 하지요. 자신이 왕인데 자기 외에 다른 왕이 태어난다는 말을 어느 누가 참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차지한 위치를 주님께 양보할 마음 없잖아요.
‘제발 이 자리는 뺏어 가시면 안 됩니다. 이것 보다 더 좋은 자리 주셔야 합니다.’

이런 기도 하지 않습니까?

헤롯왕이 곧 보편적인 인간들 모습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마태복음18장을 보면 천국 비유 중 빚진 자 비유가 나옵니다.
임금이 결산하려고 할 때 만 달란트 빚진 자가 갚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명령을 내립니다.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말합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겠습니다.
그러자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탕감 받은 종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찾아가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합니다. 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에게 하듯이 똑같이 내게 참으소서. 내가 다 갚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 달란트 탕감을 받는 자는 허락지 않고 그 빚을 갚도록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사실을 다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기 주인에게 이 사실을 다 알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를 불러 옥졸들에게 넘겼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왜 너는 네 동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냐는 이유에서입니다.

사람들은 이 본문을 보면서 반성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해야지. 그래야 천국갈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간다.’

그런데 이 본문을 보면 어느 누구나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 비유는 성령 받은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누구나 해석한다면 이것은 성령의 해석이 아니겠지요.

이 말씀은 곧 성도란 늘 용서 받은 자리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늘 십자가의 피 공로로 살아가는 자가 용서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만 달란트 용서 받은 자의 모습은 용서 받음,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는 것을 과거로 돌려 버립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는 항상 현재입니다.

그래서 만 달란트 용서 받은 자의 이런 태도가 바로 교만한 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교만이란 바로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멸시하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다윗의 큰형 엘리압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 그냥 형식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 친히 전쟁을 수행하심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내세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교만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이제 나 잘난 체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건방진 태도를 보이지 않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교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이란 십자가 앞에서 드러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린 늘 교만한 자로 드러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늘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처럼 행세하면 살아가는 자들이 여기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도의 자리는 이미 사랑 받는 자리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사랑 받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늘 교만한 자로 살아가게 하셔서 너희들이 진짜 제대로 십자가 사랑의 혜택을 입은 자들로 주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자로 살게 하십니다. 그러니 자꾸 자신의 행위를 보는 자들이 아니라 주께서 살려 주시는 대로 사시면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깊이를 더욱더 알아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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