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77

푸른 섬 2016. 8. 2. 16:20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13장 5절
무례하다는 말은 예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경본문이 읽혀지니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의 세상 경전, 즉 좋은 말을 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례하다는 아스케모네오(ajschmonevw)는 꼴사납게 행동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의 있게 행동해야 한다. 꼴사납게 행동하면 안 된다. 절대로 무례한 행동을 하면 안 된다.’라고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 들여 이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대 재미있는 현상은 누가 무례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복음을 아는 사람들을 무례하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만이 참 복음입니다.’라고 전하면 상대방이 무례하다고 하지요. 어디 감이 이렇게 신앙생활 오래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느냐고 말입니다. 내가 목사인데, 내가 장로인데 당신이 말하는 것 다 알고 있는데 왜 다 알고 있는 나에게 복음 이야기하느냐? 기분 나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왜 오랫동안 교회 다녔고 성경을 읽었고, 기도도 할 만큼 했고, 전도도 할 만큼 했고 십일조도 할 만큼 한 나에게 복음 이야기 하느냐는 것이지요.

신앙생활 삼십년 사십년 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습니다.’라고 하면 짜증냅니다.
그것은 내가 다 아는 것이고 그런 이야기 말로 다른 이야기 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곧 나에게 그런 무례한 행동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다 안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기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성경이야기, 복음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제일 어려워요.
왜 그런지 아세요. 자신들은 다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이야기 하면 짜증냅니다.

다 아는데 왜 나에게 그런 기초적인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의를 좀 갖추어서 이야기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인 수 어떻게 하면 느릴 수 있는지. 아니면 어떻게 하면 교인들을 즐겁게 교회에 오게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헌금 많이 하게 할 수 있는지. 아니면 어떻게 지루한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지 등등.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이 말씀이 오히려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이 말씀의 취지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들 자신을 위한 율법으로 율법을 이용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받고, 율법을 지키면 이 땅에서 축복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논에 물을 댄다는 뜻인데 무슨 일이든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성경말씀을 아전인수로 해석합니다.

마태복음22장23절 이하를 보면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놀립니다.
어떤 사람이 자식이 없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내가 그 동생과 결혼했습니다. 그 동생도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그 다음 동생과 결혼했습니다. 형제가 일곱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요.
어떻게 이런 결혼이 가능하냐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조차 언약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예정 가격 창세기 38장에 나오지요. 유다의 아들들 이야기 말입니다.
엘이 다말과 결혼했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생 오난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오난도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게 막내 셀라와 결혼할 차례인데 아버지 유다가 수를 씁니다.

다말 때문에 아들 셋이 다 죽게 생겼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다는 셀라를 다말과 결혼 시킬 마음이 전혀 없었지요. 그래서 결국 다말은 자신의 온갖 수치를 담당하면서까지도 언약의 자손을 낳게 됩니다. 후에 그 자손에게서 다윗이 태어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정서와 맞지 않게 언약을 이루십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보다 무례한 분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벌써 결론을 말씀 드린 것 같은데.

사두개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참 희한하지요. 왜 그럴까요?
부활이 있다는 이야기를 구약에서 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안 믿는 것이겠지요.
우리야 부활이 구약에서 있지 않습니까?
에스겔37장을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할지 모르지만 실상 그 말씀은 그런 부활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22장29-32절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하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여러분들은 이해했습니까?
그러면 부활을 믿는다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을까요?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믿는 부활이란 다름 아닌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부활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6절에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 즉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들은 이미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고 있습니다. 그 왕 노릇이라는 것이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왕노릇입니다. 물론 이 땅에 속한 자들은 절대로 이것이 왕 노릇 한다고 생각하지 않겠지요.

바리새인들은 이런 부활을 꿈도 꾸지 못합니다.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기껏해야 죽은 자도 살아난다는 수준에 머무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피로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일곱남편과 한 아내의 관계를 부활 때에는 어떻게 관계가 정리되는지를 비꼬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외워도 자신들 입장에 맞추어서 해석할 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대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둘째 부활이 없습니다. 그리고 첫째 부활은 무엇과 대비되는고 하면 둘째 사망과 대비가 됩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둘째 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은 둘째 사망을 당합니다. 육신의 죽음과 다른 사망입니다. 실상 첫째 부활과 비교해 보면 이미 이들은 둘째 사망이 덮쳐져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이라는 것이 우리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린 이미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첫째 부활에 들어갈 수 있는지. 즉 주 예수를 믿으면 첫째 부활에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리고 믿지 않으면 둘째 사망을 당한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알고 있다는 것이 첫째 부활로, 혹은 둘째 사망으로 스스로 결정해서 갈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알아서 지옥 가겠다고 말입니다.
아니면 내가 알아서 천국 가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결정권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만 첫째 부활에 참여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되지 못하고 곧장 둘째 사망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흔히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인격적이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인격적인 것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비인격적인 것을 좋아합니까?

제가 신학대학원 다닐 때 가장 많이들은 말 중 하나가 하나님은 인격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비인격적입니다. 인격을 모독하는 분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 사람의 행동을 하나도 보지 않고 천국과 지옥을 결정합니까?
그것도 자신의 아들의 피를 중심으로 말입니다. 아들의 피를 믿는 자는 영생이, 아들의 피를 믿지 않는 자는 지옥이라는 논리가 사람을 무시해도 이만저만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를 보게 되면 하나님은 너무 무례한 분입니다.
누가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까?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래 놓고 하시는 일이 우리의 행동도 보시지도 않고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하기 위해 천국 가는 자로, 지옥 가는 자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누가복음5장17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아마 이야기를 들은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기분이 상당히 나빴을 것입니다.
이들인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달아내려 보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병 낳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죄 사함 받는 것이겠습니까?

병 낳기 위해 예수님께 갔지 죄 용서 받기 위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이들은 병 낳는 것이 곧 죄 용서 받는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자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생각합니다.
‘도대체 이 신성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만약 예수님께서 병자만 고치셨으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병 고치기 전에 먼저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말씀을 먼저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속성을 끄집어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그러시고는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불편하게 할까요?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이들이 그 당시 주류들입니다.
이들의 사고 방식이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하는 사고방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이 사람들에겐 굉장히 무례한 짓이 됩니다.
그래서 이들이 기분 나빠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잖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예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 시대 상황에 좀 맞게 행동하시고 말씀하셨으면 사람들이 동의하고 박수를 쳐 주었을 것인데 꼭 하시는 일마다 그 시대를 거스르는 행동과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데반이 왜 돌에 맞아 죽었습니까?
무례했기 때문입니다. 구구절절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데 누가 기분 좋겠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 죄가 드러나는데 누가 그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들 세상에서, 너희들 사회생활에서 무례하지 말고 예의를 갖추어 살아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예의를 갖추라는 말씀은 더더욱 아닙니다.

진짜 주님의 교회에서 무례한 행동은 십자가복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말은 예의를 갖추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예의는 인간들이 만든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들입니다. ‘선배목사를 잘 대접해라. 선배 신앙인을 무시하지마라. 교회에 열심인 사람들을 존중하라.’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늘 하는 말이 교회에서 질서 운운하고 예의를 갖추라고 합니다.

이들에게서 십자가 복음은 이미 다 학습 완료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참으로 무례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자는 무례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만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인간 조직에서는 참으로 무례한 자들로 보일 뿐입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힘을 합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성도의 길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 복음 때문에 무례하다고 욕 얻는 것이 진짜 사랑을 제대로 하고 있는 자임을 증거하는 증거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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