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79

푸른 섬 2016. 8. 2. 16:21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고린도 전서 13장5절
성낸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파록시노(paroxuvnw)입니다. 뭐 헬라어 안다고 별 의미는 없습니다. 단지 파록시노 단어 의미 안에 어떤 것이 담겨 있는지를 살펴보면 성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파록시노라는 단어의 의미는 날카롭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뭐 굳이 헬라어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성내는 이유는 날카롭기 때문이잖아요. 성격이 좀 무딘 사람은 화를 잘 내지 않지요. 이와 달리 성격이 날카로운 사람은 성을 잘 냅니다.

날카롭기 때문에 남을 쉽게 자극 시키고 남을 휘젓습니다. 결국 이 날카로움으로 인해 야기되는 것은 상대를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 보면 누가 가장 많이 성을 내는 것 같습니까? 누가 가장 날카로운 것 같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보다 성을 잘 내는 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화를 내지 않으시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 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실 때 아주 다정하게 쫓아냈겠습니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 말았어야지요. 또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의 길을 막지 않아야지요.

처음 화를 내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상당히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상상하는 신은 이런 신이 아니잖아요.

자신이 만들었으면 잘못을 하더라도 그 잘못을 자기에게 돌려야지 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에게 화를 내느냐 말입니다.

일을 하시는 방식이 참 특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뭔가 은혜를 베푼다는 식으로 인간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싸움에서 여자의 후손의 승리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우리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도무지 납득이 안 됩니다.
승리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에덴동산에서 문제를 야기하는 선악과를 만들지를 말든지, 아니면 만드시더라도 꼭꼭 보해해서 어느 누구도 접근 못하게 백만 볼트 전류가 흐르는 고압선으로 막아 놓든지 해야 우리들이 납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어릴 때부터 궁금했던 것이 이것이었거든요. 중고등학생때도 마찬가지고 대학생 때에도 제일 많이 질문하고 받는 것이 이 문제잖아요.

그래서 돌아오는 답변은 몰라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교회에서 믿는다는 하나님은 우리들이 보기에 납득이 되는 하나님이시지 납득이 되지 않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죄와 관련되어서는 죄를 야기하시는 하나님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죄의 책임을 인간에게만 돌리려는 지사충성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역은 인간들이 목숨 걸고 지켜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죄를 조장하시거나 죄를 짓게 하시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라면 화를 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적인 타락이라는 것을 인간의 행위로 봅니다.
만일 전적인 타락을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다고 한다면 이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도 없고 오히려 그런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라고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죄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로마서 11장 3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지기 위해 만들어 졌고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있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믿게 되면 자신이 부정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로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간이 능동적으로 행동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피동적으로 행한 일이 되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행위가 모두 의미 없어진다는 생각 아니면 모든 행위가 죄로 드러난다는 생각은 하기도 싫은 것입니다.

로마서 5장20절을 보면 율법을 주신 이유가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말씀도 화나는 말이지만 이 말씀은 더더욱 화를 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린 더 이상 성경 읽을 필요도 없어지고 배울 필요가 없어지잖아요.

물론 목사들은 성경은 율법이 아니라고 우깁니다마는 말씀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인데 여기에 율법 따로 그리고 아닌 것 따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구분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 안 믿으면 지옥 가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까? 율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예수 믿으면 지옥 간다는 말씀자체도 로마서 5장20절에 근거하면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이 됩니다. 물론 저들은 이렇게 해석하지 않지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렇게 된다면 믿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구원 얻는 꼴이 됩니다.

그러니 보세요. 로마서 5장 20절이 딱 맞잖아요. 결국 인간들은 성경을 보면서 죄만 드러날 뿐이지 성경을 보면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복음 앞에서 인간들은 날카로워집니다.
화를 냅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유다 가운데 보내십니다. 그런데 이사야를 유다 가운데 보내는 이유는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가 막히게 하고 눈을 감기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면 여러분 생각에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안 전하겠습니까?
당연히 전하지 않지요. 왜 그렇습니까? 어차피 끝났잖아요. 어차피 못 알아들을 것인데 왜 내가 수고해야 됩니까?

이런 사람 성경에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인데 참으로 우리와 꼭 닮은 선지자입니다. 니느웨 성의 악독이 여호와 앞에 상달 되었기에 니느웨로 가서 그 심판을 외치라고 합니다. 그러자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갑니다.

우리는 요나가 왜 이렇게 도망하는지 이해가 잘 안가지요.
그냥 그 자리에 있어도 되잖아요. 안가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의 심정이 여기에 잘 드러납니다. 니느웨성과 정 반대되는 곳이 다시스로 가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그 놈들 망해도 쌀 놈들이다. 그러니 내가 니느웨와 가까이 있는 것도 싫다는 것입니다. 가능한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망할 자는 반드시 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니느웨로 가서 외친 후 초막을 짓고 여호와께서 마련하신 박넝쿨의 혜택을 받으면서 니느웨가 멸망당하는 꼴을 기어코 보고야 말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박넝쿨이 말라 죽었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버럭 화를 냅니다. 화가 나서 죽겠다고 하지요. 비단 박넝쿨로 인함뿐일까요? 아니지요. 앞서 니느웨성이 회개하자 말씀하신 재앙이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심히 싫어합니다. 왜 말씀대로 심판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자신이 다시스로 도망한 이유를 말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시고 노하지를 더디 하시고 인해가 크시기 때문에 회개하면 얼마든지 뜻을 돌이킬 줄 내가 알았기 때문에 다시스로 도망했다는 것이지요. 혹시 니느웨성이 회개 하여 심판을 받지 않을까 해서 자신이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취해 달라고 합니다. 요나의 입장에서 얼마나 자신이 행한 일이 한스럽겠습니까? 꼴 보기 싫은 놈들 멸망당하는 꼴을 봐야 되는데 자기 때문에 못 보게 되었으니 오히려 자신을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박넝쿨로 인하여는 시원하니 심히 기뻐했다고 합니다.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요나 아닙니까?
어떻게 이렇게 죽여 달라 해놓고, 화를 내고 나서 곧장 박넝쿨로 시원하니 심히 기뻐하고 , 그리고는 박넝쿨리 시드니 그 것 때문에 또 화를 내고 죽는 것이 낫다고 합니까?

여러분이라면 이런 사람 어떻게 평가를 내리겠습니까?
성격이 너무 날카로워. 한 수 배워야 겠다. 참는 법을.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요나의 모습이 우리 모습입니다.
우린 늘 상 화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지요. 내 뜻대로 안 되면 화내잖아요.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대로 안 해 주시면 분노하잖아요.

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분노할까요?
왜 화를 내어 예수님을 죽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뜻대로 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분노하시는 분이신지를, 그리고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지를 보여주시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의 분노하심은 빼고 사랑만 챙기려고 하지요. 그러니 예수님에 대해 분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숨 걸고 요나처럼 화를 냅니다.

마태복음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34)”
아니 결혼해서 알콩달콩 잘 살아 보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가정을 갈기갈기 찢으시기 위해 오셨다고 하니 화나지 않을 인간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와 아들, 엄마와 딸의 관계가 어떻게 되기를 원합니까?
좋은 사이이기를 바라잖아요. 물론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당연히 찢어져 있는 상태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원래 나쁜 관계 같으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하시겠습니까?

돈을 백억 원 정도 갖고 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원수가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내 목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네 목숨을 내어 놓아라’고 합니다.

그러니 화나지요. 장사 안 된다고 자식 말 안 듣는다고 화나잖아요.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햇빛나면 햇빛나는대로 이건 자신이 신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기분에 의해 좌우됩니다.

사랑은 화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중에 화내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사실 화를 내실 분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친 것입니다. 도끼들고 오신 주님입니다. 주님만이 유일하게 화를 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시작하셨기 때문이요 그 과정과 결과를 주님이 마무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주님이 왜 화를 내셔야 하는지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증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우리가 화를 냄으로 가능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지요. 우리에겐 우리의 주도권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화를 내어 주님의 분노하심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화냄조차 주님께서 주님의 날카로운 분노를 증거하기 위해 동원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화를 내든지 화를 내지 않든지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십자가 피로 주어지는 혜택 속에 담겨 있어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즉, 화내지 않는 사랑과 분노를 증거하기 위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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