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81

푸른 섬 2016. 8. 2. 16:21
기뻐하는 이유
고린도전서 13장 6절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어떨 때 즐겁고 어떨 때 기쁩니까? 내가 바라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때 기쁘고 즐겁지요. 만일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즐겁지 않습니다.

축구경기를 보아도 야구 경기를 보아도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거나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잘하면 기쁘고 즐겁습니다.

내 뜻이 관철될 때 즐겁고 행복해집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6일 동안 매일 매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 좋으심의 결정판이 7일째 되는 안식일입니다.

토브(b/f)라는 단어는 ‘좋다’라는 의미도 있고 ‘선하다’라는 의미도 있고 ‘기쁘다’라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선하게 보이니 좋고, 좋으니 당연히 기쁘겠지요.

우린 기쁨을 우리 인간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내가 기쁘면 모든 것이 다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일 내가 기쁘지 않으면 다 기분 나쁩니다. 내가 안 좋으면 모든 것이 다 안 좋습니다.

남의 자식이 상을 타면 기분 나빠요. 내 자식이 상 타면 기분 좋아요. 남이 사업이 잘 되면 기분 안 좋아요. 그런데 내가 사업이 잘 되면 기분이 유쾌해 집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기쁨을 이야기할 때 불의나 진리는 고려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1509년 영국의 헨리 8세는 아버지 헨리 7세로부터 엄청나게 강화된 왕권을 물려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열렬한 카톨릭 신봉자였습니다. 즉 교황 말에 순종 잘하고 교황청에 납부할 돈도 열심히 모았습니다. 자신을 지지해 주니 얼마나 즐거운 열심을 냈겠습니까?

그런데 캐스린 왕비와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려고 했습니다. 문제는 교황청에서 캐스린 왕비와의 이혼을 허락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헨리 8세가 영국국교회를 세우고 교황과 결별했습니다. 당시 카톨릭과 영국 국교회의 차이는 교황의 자리에 국왕이 대신한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나의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등 돌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좋으면 그것이 의가 되고 진리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획 돌아서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좋으심은 반드시 불의와 진리가 고려대상입니다.

마가복음1장11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물세례 받으신 예수님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냥 예수님을 기뻐한다고 하시면 안 되고 물세례 받으신 예수님을 기뻐하십니까?
우리가 볼 때에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쁨이 되지 못하고 물세례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은 불의나 진리가 자신의 기쁨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창세기 6장2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이렇게 나옵니다.
자신들이 좋으면 그만이지 여기에 불의와 진리를 고려할 하등의 이유도 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신이 없는 전형적인 모습이 육체의 모습인데, 이 육체(rc;B;)라는 의미는 오직 자기의 좋음만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살찜으로만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심판은 당연한 것입니다.

살찜만 있는 인간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뭐 다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4장38,3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 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장가들고 시집가고 먹고 마시지 않습니까?
우리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어떤 정신 나간 사람들은 장가들지 않겠다. 시집가지 않겠다 하면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는 그래봐야 그들이 먹고 마시지 않습니까? 노아 시대 때에 시집가지 않은 사람들, 장가들지 않은 사람들 많았습니다.
갓난아기들이 장가가고 시집갔겠습니까?

그리고 먹고 마시지 않겠다고 몇날 며칠을 먹고 마시지 않는 미친 사람들이 있지요.
그 당시에도 그런 사람 있었습니다.
아파서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일상사 자체가 자기 기쁨을 위한 일이기에 멸망당했다는 말씀입니다. 달리 말하면 불의나 진리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이 오실 때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노아시대 때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노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자신의 삶이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멸망당한 자들은 노아의 삶이 자신들의 삶의 다른 모습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 당시 배 만드는 사람 없었겠습니까? 노아도 결혼했고 역시 자식들 낳았고 먹고 마시고 했습니다.

홍수 심판 후 얼마나 평소에 포도주를 많이 마셨으면 그렇게 취했겠습니까?
노아의 평소 모습입니다.

그러니 노아 주변 사람들은 방주 만드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자신들과 다른 노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물 심판 온다는 사실 누가 믿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불로써 심판하신다는 사실 어느 누가 믿습니까? 지금 내 기쁨, 내 즐거움이 최우선인데.
그 심판도 내 기쁨 내 즐거움이 된다면야 내가 믿어 주겠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강림은 어느 누구도 믿지도 않지만 바라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요. 그러면 묻겠습니다. 지금 죽어도 좋습니까?
시집갈 딸을 두고 죽어도 좋습니까? 이제 막 사업 성공해서 좋은 집 사고 좋은 차 샀는데 죽어도 좋습니까?
이제 얘가 열 살, 열한 살, 열 두 살인데 죽어도 좋습니까?

아무도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두고 살 이라고 합니다. 살찜뿐인, 흙으로 돌아가야 할 육체일 뿐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 뿐인 육이 하는 일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나만 기쁘면 되고 나만 즐거우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의는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를 의롭게 여기신 것입니다.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동행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사람들은 노아가 정말 흠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술 취해 자식 저주하는 노아의 모습에 실망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처음부터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면 왜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평가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동행은 정결한 짐승의 희생을 품고 있는 동행입니다.

노아는 나중에 이것을 알게 되었지요. 물론 알아도 그 앎이 노아의 행위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정결한 짐승의 희생을 더욱더 돋보이게 하는 행위, 삶을 살 뿐입니다.

이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지요. 그러니 노아는 여전히 자신의 즐거움, 기쁨을 위해 살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만나기 위해 내 기쁨과 나의 즐거움을 줄이겠다는 것은 또 다른 자신의 즐거움 기쁨을 찾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밤새도록 곡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겨 드디어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었는데 그 곳은 민주주의 투표로 인해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땅임을 스스로 인정한 결과였습니다.

참으로 재미있지 않습니까?
민주주의의 꽃인 투표로 자신들이 들어가지 않겠다고 결정해 놓고 원망은 하나님께 합니다.

이들이 기대하고 소망한 것이 현실과 차이가 나니 정말 기뻐해야 하고 즐거워야 할 시간이 곡하는 시간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살찜은 일하지 않고 먹고 살고 싶잖아요. 돈 버는데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가족과 떨어져 살지 않고, 남에게 머리 조아리지 않고 큰 소리 치며 살고 싶잖아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늘 근심이요 걱정이요 눈물이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불의나 진리에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불의를 기뻐하는 족속이라는 말입니다.
즉 육에 속한 자는 항상 불의를 기뻐하고 진리가 없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이것을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눈만 뜨면 우리는 나를 위해 살기 바빠요.

우리의 환경자체가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이 몸 자체가 주변 환경과 만나면서 내 몸의 기쁨을 위해 살아라고 부추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만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 이야기 끄집어 낼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끄집어내면 분위기가 싸해 집니다.

자신은 죄인이라고 하면, 자신은 죄만 짓고 불의하며 오직 주님의 피만이 의롭다고 이야기 하면 사람들로부터 미움당합니다. 미움 당하기 전에 정신 나간 사람 취급받습니다.

세상에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 돈이지 무슨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복음이냐고 비아냥됩니다.

갈라디아서 4장10절에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날과 달과 절기를 아주 주의 깊게 지킨다고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피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의 피도 믿고 날과 달과 절기도 바리새인들처럼 지킵니다.

우리가 보기엔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날과 달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자기 종 삼기 위한 술책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왜 말씀대로 십일조 하세요. 주일 성수 하세요. 기도 하세요. 성경 읽으세요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를 갈라디아서 4장17절에 보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게서 떠나 자기들에게 열심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왜 자기 교회를 만들 수 없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오늘날 목사들과는 너무나 대조되지요.
왜 목회 일에 열심을 냅니까?
왜 교회 일에 열심을 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종 삼으려고 열심냅니다. 자기 즐거움을 위해 열심내는 것입니다.

교회일 열심히 하는 사람치고 기쁘지 않다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에서 맨날 싸우고 미움 받아도 자신은 기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다 자기 기쁨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 입에서 십자가 이야기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의 피만이 의롭습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렇게 미움 받는 것을 의로 여깁니다. 그래서 기뻐하지요. 십자가의 피를 전해서 미움 받는다면 이해가 될지 모르지만 그런 것 없습니다. 오직 자기 즐거움을 위해 열심을 내다가 시기 질투 받아 미움당할 뿐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와 달리 영에 속한 자들은 십자가의 피만을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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