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83

푸른 섬 2016. 8. 2. 16:22
영원한 것과 폐하는 것
고린도전서 13장8절
사랑은 영원하지만 예언과 방언, 그리고 지식은 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사랑이 좋습니까 아니면 예언이나 방언, 지식이 좋습니까?

사실 사랑이나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은 뽐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랑을 뽐낸다는 것은 십자가 피만 자랑한다는 말인데 십자가 피만을 뽐내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하나님 자리에 앉아야 속이 시원한 자들입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하면 안색이 변합니다. 가인만 안색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에서를 보더라도 장난처럼 여겼던 장자의 명분을 잃고 실제 이삭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게 되니 야곱을 죽이겠다고 결심합니다.

야곱도 이와 다르지 않지요. 물론 말씀에 근거한 장자권 쟁취였지만 그의 본성 자체가 빻았는데 선수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 합니다.

한쪽은 육신적으로 장자이니 당연히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고 야곱은 비록 장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반드시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게야 말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니 사랑을 내세운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지요.

흔히 우리들이 말하는 그런 사랑을 뽐내면 사람들이 높여 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지신 그 사랑을 뽐낸다면 절대로 그 사람을 높여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을 뽐내게 된다면 자신은 만물의 찌기처럼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3장22절 이하를 보면 세례요한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 보이니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살짝 시기를 하지요. 제가 살짝이라고 표현했지만 엄청 시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이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한 자는 너희니라(요3:28).”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주목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지요.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신데 그리스도도 아닌 주제에 자신을 주목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너희들이 질투할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이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 사람이 바로 우리의 스승인 세례요한이라고 증거해야 하는 자들이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야 이게 뭐가 어렵느냐고 하시겠지만 우리 몸이 여기에 개입하고 자리 잡게 되면 이 말씀은 우리에겐 불가능한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이 그 다음 뭐라고 합니까?
“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로서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이 충만하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우리도 충분이 세례요한의 입장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친구정도면 자신도 친구로서 윈윈할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요한이 왜 굳이 이런 말을 합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증인들의 특징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망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망하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님이 흥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이 돋보일 수가 없습니다.

우린 항상 나도 망하지 않고 예수님도 증거되는 그런 삶을 원하잖아요. 그래서 언제나 내 자손심도 챙기고 예수님도 전하는 삶을 살길 원하잖아요.

선교사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피를 전하지 않잖아요. 후원하는 교회에 가서 피를 자랑해 보세요.
그다음 후원금 사라집니다.

자신이 만든 자그마한 역사를 자랑해야 사람들이 눈물도 흘리고 기도도 해 주고 마지막이 한 뭉치 돈을 쥐어 줍니다. 이런 것을 보면 결국 나는 망하면 안 된다는 입장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요.

베드로 후서3장3절을 보면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한다고 합니다.
이들이 무엇을 조롱하는 고 하면 주님이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조롱합니다.

이들이 주님의 심판을 왜 조롱할까요?

주님의 심판이 있다면 내가 지금 이 땅에서 이룬 것, 노력하는 것, 만들어 놓은 것들이 헛것이 되기 때문이지요.
제가 어릴 때 봄이 되면 대청소를 한 번씩 합니다.
그럴 때 필요 없는 것들은 다 아궁이에 집어넣어 불에 태워버립니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어느 것 하나 태우지 않지요.

그런데 주님의 심판이 이렇다는 겁니다. 다 탄다는 겁니다.

내가 피 땀 흘려 만든 나의 자리를 싹 다 태워버린답니다. 그리니 주님의 심판을 조롱하지 않을 수 없지요.
지금 먹기 싫은 술까지 퍼 마셔 가면서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고 쌓았는데 주님이 그것을 헛것으로 만드신다고 하니 웃기지 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불로써 심판당하는 일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은 자기 몸이 원하는 것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것이 모두라고 몸은 계속해서 반복해서 보여 주잖아요.

몸은 이것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생각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습니까?

바로 주님이 주신 은사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예언과 방언, 지식 이것들은 무엇은 담고 있습니까?
사랑을 담고 있지요.
십자가의 피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사랑과 달리 사람의 소유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언을 하잖아요. 십자가의 피를 증명하는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디에 관심을 가질까요?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는 예언을 하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세례요한 말씀드렸지요. 그 제자들을 보세요. 이들의 안목이 우리의 안목입니다.

방언도 마찬가지이지요. 방언의 내용을 보면 역시나 십자가의 피, 주님의 사랑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특수한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인데 그 해석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큰일, 즉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관심은 하나님의 큰일에 있지 않습니다. 그 나타난 현상에 있지요.

사도행전8장9절 이하를 보면 사마리아 성에 빌립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표적과 큰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 하신 일들이 그대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린 어디에 관심을 둬야 할까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주님으로 살아 계시는데 관심을 가져야 하겠지요. 그런데 시몬이라는 마술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술은 이전부터 사마리아 성 사람들을 아주 놀라게 했으며 아주 큰 사람이라 하면서 신분이 낮은 사람부터 신분이 높은 사람까지 다 따랐습니다. 심지어 그가 행하는 일을 하나님의 능력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곳에 베드로와 요한이 도착해서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성령세례 받는 모습을 본 시몬이 이런 요청을 합니다.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행8:19).”

본문이 좀 이상하다는 느낌 들지 않습니까?
왜 시몬에게는 안수를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알아요. 물론 주님이 알고 계시지요.

그래서 시몬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는 성령세례를 돈으로 살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린 마술사 시몬을 욕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지요. 어떻게 성령세례를 돈으로 사려고 하는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좀 깊이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교회에서 왜 기도합니까?
내 뜻 이뤄 달라고 기도하잖아요.
자신의 눈물과 열심과 간절함을 하나님이 들어 주실 것이라 확신하며 기도하잖아요.

이것과 마술사 시몬과 뭐가 다릅니까?
돈 주고 성령세례를 사겠다는 것과 자신의 헌신으로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받겠다는 것이 뭐가 다릅니까?

마술사 시몬은 성령세례를 사람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소유로 본 것이지요. 얼마든지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으로 마음껏 자신을 뽐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방언과 예언은 성령 받은 증거물들이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것들은 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들을 폐한다고 하면 누가 가장 기분 나빠하겠습니까?

방언 한다는 자들,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가장 기분 나쁘겠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직은 방언이나 예언이 폐하지 않았으니 그래도 우린 가치 있어 라고 하겠지요.

지금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방언과 예언을 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가장 앞서 사랑은 영원하다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들은 몸 안에 어떤 현상만 일어나면 그것으로 자기 자랑삼기 바쁩니다.

마지막으로 지식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에 나오는 지식이 보통 지식이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 아니겠습니까?

쉽게 말하면 수 십 년간 주님 사랑에 대한 연구들, 경험한 것들이 가득 담겨 있는 그야 말로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지식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주님은 헛되다고 하십니다. 헛되다는 말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헛됨을 보여 주기 위한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은 망해야 하고 주님만 흥해야 함을 보여주는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의 친구들이 얼마나 똑똑합니까? 하나님을 알아도 너무 잘 알아요.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뭔가 자신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식도 폐한다는 말씀 앞에 그런 생각이 십자가 원수임을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 앞에 자신이 십자가의 원수임이 드러나게 되면 자기 자랑할 거리가 없어집니다.
갈라디아서 6장14절을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은 자신은 항상 죄인 중의 괴수로 드러 났다는 말입니다.
이런 바울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만일 사도 바울을 여러분 교회 목사님으로 계시면 처음에야 그럴 수 있지라고 하겠지만 교회 오는 재미 없어서 사도바울을 쫓아 낼 겁니다.

적어도 교회 꼬박꼬박 열심히 나오는 사람들은 인정해 주고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해 줘야 교회 올 맛이 나잖아요. 그런데 바쁜 시간에 교회 왔는데, 그것도 그냥오지 않고 헌금까지 들고 왔는데 매번 목사가 하는 설교가 우린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면서 십자가의 피만 자랑합시다라고 하면 어느 누가 듣고 싶겠습니까?

여러분 사랑만 영원하고 예언과 방언과 지식은 폐합니다. 그러니 우린 늘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놓여 있어서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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