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82

푸른 섬 2016. 8. 2. 16:22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디는 사랑
고린도전서 13장7절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설교 같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5장 10-12절을 보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어떻습니까? 이 정도는 참아야 참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레미야 18장18절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합니다. 죄를 지적하는 선지자를 좋아할 사람 있을까요? 운전할 때 옆에서 잔소리 하면 화내잖아요.

지적질 하는 소리는 무조건 기분 나빠요. 이런 우리 일상적인 일에서 조차 기분 나빠하는 인간들인데 대 놓고 너 화내는 것 보니 망해야 해. 너는 망하는 것이,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해라고 해 보세요. 그런 사람을 누가 가만히 두겠습니까?

선지자들의 외침은 자신의 이익과는 전혀 무관한 외침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난당했고 죽임까지 당했습니다. 참아도 이 정도는 참아야 참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것을 참는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라는 말을 달리 말하면 항상 참는다는 말입니다.

운전하는데 옆에서 잔소리 해도 참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시키신 잔소리고 배드민턴 칠 때도 옆에서 싫은 소리해도 그것도 주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곳에서 주님은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는 늘 주님의 목적에 늘 다루어짐을 당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다루심에 어떻게 반대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라는 말씀 앞에서 우린 전혀 죽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는데 사업 잘 안 되는 것도 견디지 못해 자살하잖아요. 우린 주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려 주지 않으면 다 자살할 인간들입니다.

어떤 것도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데 어디 이 말씀이 믿어집니까?
모든 것이 주님의 피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다루어지고 이루어지고 사용되어진다는 사실 안 믿잖아요.

우린 오직 내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가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6장24절을 보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누가 이 말씀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우린 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자들이잖아요.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 생각이지요.

주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으면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멘’하면 끝날 것을 자신이 이 말씀을 지켜보려고 발악을 하지요.

난 늘 재물만 섬기는 자입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그래 난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심하고 또 결심하잖아요.

물론 어떤 도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어차피 난 재물만 섬기는 자니 재물만 위해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주님을 말씀을 이용해 먹지요. 그래서 지옥 가는 겁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이용하시는데 마귀의 종들은 말씀을 자신을 위해 이용할 생각만 합니다.

욥을 보게 되면 욥의 평소 신앙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이 자신을 이용한다는 생각을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모든 우주의 중심이 자신을 위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이유 없는 고난을 이해 할 수 없지요. 욥에게는 분명 어떤 이유도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런 재난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곧 자신이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았기에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욥기 1장5절을 보세요. 자녀들을 성결케 하고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자녀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해서 이렇게 번제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완벽한 신앙생활입니까? 그런데 자신에게 이유도 없는 고난이 왔습니다.

처음에는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강도가 더 심해지고 친구들의 추궁에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가를 항변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참았고 견뎠고 믿은 것들이 이유 없는 고난 앞에 다 무너져 내립니다.

제가 지금 욥을 까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메시야가 아닙니다.

허다한 주님의 증인 중 한 사람입니다.
욥을 보게 되면 우린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견디는 것이 이유 없는 견딤이 되어 버리니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견디는 이유는 자신이 바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참지 않겠다. 믿지 않겠다. 견디지 않겠다.’ 고 합니다.

우린 우리 자녀가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아내 남편 만나는 바램으로 모든 것을 참고 믿고 견디고 있잖아요. 자식만은 나 보다 더 좋은 집에서 살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잖아요. 그 믿음 하나로 힘든 세상을 살잖아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위해 참고 믿고 견디는 사람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입니까?
빌립보서3장6절에서 사도바울이 과거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해 줍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얼마나 말씀대로 살았으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겠습니까?
물론 예수님 앞에 그 죄가 드러나기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삶은 그 당시 예수님 외에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 같은 사람에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하면 이들이 이런 사랑 실천하려고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물어보는 제가 이상한 사람이지요. 당연히 사랑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으니 이 사랑 실천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도 이렇게 산다고 말하는 사람 많습니다. 물론 양심은 있어서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성화라는 것이 그런 것이잖아요. 완전한 데까지 나아가는 것. 예수 믿고 막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절제하고, 기도하고, 봉사 하고, 헌신 하고, 사회봉사도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예수 믿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 마귀가 노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돋보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늘 자신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마귀가 배후 조종하는 줄도 모르지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말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에 있었서는 하나님과 같이 되었지만 하나님 눈에 보이는 마귀는 인간들 눈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뱀과 대화를 나누잖아요. 뱀을 알아봅니다. 마귀를 알아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더 이상 뱀을 알아보지 못해요. 동물원에 있는 뱀 아닙니다.

마귀를 알아보지 못해요. 이건 마귀와 일심동체가 되어 자신이 자기를 볼 수 없듯이 마귀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도 거울이 없다면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요.

마귀는 거울에 비치지 않습니다. 귀신 영화에나 나오지만 마귀는 어디에 비칠 때 그 모습을 드러냅니까?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전하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의 피를 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을 좋아합니까?
예수님의 피를 좋아하지 않고 선한 행위를 좋아합니다.
복음 복음 하지만 결국 행위로 보여주지 못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다 맞고 옳다고 합니다. 그런데 끝에 딱 한 마디 덧붙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산다는 말은 곧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마귀의 말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삶이야말로 주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 있으면 누구나 인정하고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왜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을 좋아합니까? 말씀대로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디 그 사람이 십자가 피를 전합니까? 예수님을 닮는 삶을 전한 거잖아요.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잖아요.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남을 살린 예수님처럼 살았잖아요. 그러니 사람들이 열광하고 박수 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마귀가 바라던 바 이기 때문이지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견디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임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그런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분명 의미가 다르지요.
지켜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참으로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런 사랑 예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지요.
주의 자리에 앉기 위한 사랑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든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기 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제대로 증거하는 것이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한껏 치켜세우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마귀가 좋아하지요.

주님의 자리에 인간을 앉히니 얼마나 마귀가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습니까?
십자가 사랑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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