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80

푸른 섬 2016. 8. 2. 16:21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장 5절
악이란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생각하는 악이라는 것은 자기 양심에 위배되는 것을 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양심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마다 다르지요. 그래서 힘 있는 자들이 생각하는 양심을 강요합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권력가진자 말 듣는 것이 곧 양심적인 일이요 선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 23,24절을 보면 라멕의 노래가 나옵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 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로다.”

라멕이 왜 하필 아내들에게 이런 노래로 세뇌시킬까요? 노래라는 것은 세뇌하는 기능이 있지요. 새마을 운동을 해도 노래를 앞장세잖아요. 군가가 그 대표적인 것이지요.

여자의 역할이라는 것은 사실 약속의 자손, 여자의 후손을 낳는 역할입니다. 여자들이 아들을 낳는 것은 생명이라고 이름이 바꿔진 하와의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식을 낳을 때마다 약속의 자손을 증거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15절을 보면 참 난해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순결로써 단정한 생활을 계속하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좀 알아듣기 쉽잖아요.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있어요. 자녀 낳고, 믿음, 사랑 순결로써 단정한 생활을 계속하면, 지속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잖아요.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경 말씀을 법으로 보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번역해도 문제는 어떻게 이 생활을 지속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잖아요. 지속이라는 말은 그 속에 산다는 말이거든요.

성경에 ‘거하면’이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이것은 그 속에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능성으로 성경을 접근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악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말씀은 분명 약속의 자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자들이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한다는 말씀은 사실 우리들이 접근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서 중보도 한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곧 그리스도십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것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해 남자 여자를 지으시고 그 역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라”
왜 이 과정을 말씀하시는고 하면 중보자가 누구신지를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여자가 어떤 역할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15절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이런 것입니다.
‘여자는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구원 얻는다.’ 이 말이 얼마나 쉽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우린 이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구원 얻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잖아요. 이것이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주시는 분이 기준이지 듣는 자가 기준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그들은 주시는 분이 무얼 원하시는지 자신들이 알아서 해석해서 지키려고 하고 순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주시는 분이 원래 계획한 아들을 보내주시니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15절 말씀을 지금 우리가 들어도 잘 이해가 안 되는 이유는 우린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을 듣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15장18-20절을 봅시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 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서 또 우리의 본성이 작동합니다. ‘그렇지. 그러니 마음을 잘 다스려서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하지 않으면 되겠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몸 자체가 악하다는 말입니다. 기계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그 기계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악한 것 밖에 생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나름대로 선한 것이라는 것 조차도 만들어낸 기계가 악하기 때문에 악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장18절 이하를 인간들의 악한 행적들이 나오지요. 물론 이 말씀 속에는 인간들의 사랑, 소망, 믿음, 형제우애, 희생, 봉사, 충성 이런 것들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체계를 갖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또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그렇지. 인간의 언어체계를 갖고 말씀하셨다는 말은 우리 인간들이 알아들으라고 하신 말씀이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태복음13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로마서 말씀은 비유가 아니잖아요라고 반박할 것입니다.
비유라는 말을 꼭 해야 비유가 됩니까?

인간끼리도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이 차이가 존재하잖아요.
강도 문제가 개입되면 말하는 자의 강도와 듣는 자의 강도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충 서로 합의를 보고 알아 들었다고 할 뿐이지요. 그래서 이런 차이를 없애기 위해 모든 것을 숫자로 표기하지요. 그래도 내가 느끼는 일과 상대가 생각하는 일이 다릅니다.

말씀을 주신 분만이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말씀하시는 악함이라는 것은 그냥 인간의 악함을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여기에 해당사항 없다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 우상 숭배 하지 않아요. 나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없어요 하는 사람들은 천국갑니까?
이런 사람 있잖아요.
부자 청년.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키고 살았는데 당연히 당당히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의 탐욕이 드러났다고 말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 죄가 드러났지 사람 앞에서는 그 죄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금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구원얻기 위해서 예. 예수님 말씀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겠습니다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 있잖아요.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은 구원얻습니까?

구원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라고 하면 사람들은 악한 것을 떠올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기껏해야 로마서 1장에서 나오는 그런 악한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우상숭배나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 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언급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옵니다.
25절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성경 본문에 보면 나사로가 세상에 살았을 때에 받는 것이라고는 거지취급 받는 것 뿐입니다.
20절을 보면 헌데 투성이로 부잣집 대문 앞에 버려졌습니다.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습니다.

이 삶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고난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쓰인 단어 고난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악 이라는 단어입니다.
달리 말하면 나사로는 이 땅에서 악을 당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 길가다보면 거지들 만나잖아요. 그러면 거지들에게 돈 안 주면 우리가 악을 행하는 것입니까? 거지가 거지처럼 산 것이 악을 당한, 고난 당한 일이라면 우리 모두 거지로 삽시다. 그러면 천국갈 수 있는데 그것 하나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다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간 고상한 거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스 메테오라 나 터키 갑바도기아에 가보면 정말 멋진 수도원들이 많아요.
바위산에 구멍 작에 파 놓고 그 곳에서 거지보다 더 고상하게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들이 고난받은 것입니까?

아마 자신들은 고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거지 나사로처럼 살았다고 확신할 것입니다. 그러니 천국은 당연히 갈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악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거지로 산다고 악한 자가 아닐까요?
죄와 상관없는 자일까요?

거지도 역시 죄인이지요. 그런데 왜 부자는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고 거지는 고난을 당한 것이 됩니까?

이것은 일방적인 주님의 선언입니다.
우리 눈에는 부자는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지옥가고 거지는 땅에서 개고생 했으니 천국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예수님이 결정합니다. 어느 누구의 행함도 여기에 개입될 수 없습니다.

부자를 한번 보세요. 부자가 그냥 부자가 아닙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고 말씀대로 사는 부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부자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면 부자가 왜 지옥 갔습니까?

인간들은 누구나 부자처럼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 돈 좀 있으면 좋은 차 타고 싶지 않습니까?

지금 좋은 차 타고 다니 잖아요. 날마다 먹고 싶은 것 먹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하잖아요. 물론 가끔 시간 내어서 성경공부 참석하고, 예배 참석하고 말입니다.

부자와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똑 같잖아요.

우린 나 자신을 자꾸 거지라고 우깁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거지처럼 악을 당한 자로 고난 당한 자로 살수 없습니다. 거지는 거지로 살았을 뿐인데 그 삶을 고난으로, 악을 당한 것으로 인정한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악한 자인데 악을 당한 자로 고난당한 자로 간주하시겠다는 것은 곧 인간의 삶 자체를 악으로, 고난을 유발하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악이라는 말은 그냥 악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악함이 무엇을 겨냥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겨냥 합니다.

착한 행동, 헌금, 십일조, 봉사, 전도, 선교, 구제, 희생, 충성,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사도행전4장25,26절을 보면 시편2편 말씀이 나옵니다.
1,2절을 봅시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이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을 봅시다.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이들이 아들을 죽이는 이유는 예수님께 매이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귀의 종 노릇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은 이것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알았다면 죽일 이유가 있겠습니까?

십자가 사랑 앞에서 그 악은 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본 모습이 드러났을 때 구원받은 자는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가 나옵니다. 십자가 사랑을 끊어 버리려고 하는 모습이 참 악의 모습임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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