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78

푸른 섬 2016. 8. 2. 16:20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13장5절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님은 다 우상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십계명이 나옵니다.

3절을 보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나’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고 하면 2절에 나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나 외에 다른 신들이라는 것은 곧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지 않은 신은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천국에 가는 것이지 내 과거가 뭐 그리 중요하냐 말입니다. 하나님이라면 그냥 죄용서 하고 구원해서 천국에 집어 넣어 주면 되는 것이지 무슨 어떻게 나를 구원한 신인지를 꼭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이 피곤한 것이 이것입니다.
과거의 사건은 과거로 끝내시지 왜 애굽에서 빠져 나온 지 벌써 삼 개월이나 지났는데 왜 그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현재화 시키려고 하느냐 말입니다.

십계명이라는 것을 살펴 보면 이것은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신 네 하나님이 과거가 아니라 늘 현재화시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쯤 되면 여러분 속에서 분노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떠했겠습니다.
우리가 모세가 인도하는 그 자리에 있었다면 십계명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열렬히 환영하겠습니까?

환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확실한 것 하나 붙들고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빠져 나가면 애굽의 삶보다는 더 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꿈이 초장부터 산산조각 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십계명 주실 때 그 분위기가 매우 험악합니다. 주신 계명을 준행하겠습니다(출24:3)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백성들이 떨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마치 칼을 목에다 대고 너 믿을 거야 말거야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해제된 후 자신들을 이끌 모세의 부재 속에서 이들은 그들을 인도한 존재를 만들어 냅니다.

출애굽기32장1절을 한번 봅시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이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한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이들이 십계명을 압니까 모릅니까? 알아요. 분명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들이 어떤 신을 섬깁니까?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을 섬깁니까? 아닙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애굽 땅에서 인도한 신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그 신상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그들의 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오면 하나님께서 그냥 수용하시면 안 됩니까?
어차피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잖아요. 못 알아듣기 때문에 자신들이 나름대로 알아들은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그 송아지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절대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다 진멸하고 모세로 큰 나라로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를 갖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나오실까요? 왜 하나도 양보가 없으실까요? 그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약속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밖에 모릅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동원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영원한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그들을 편하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증거하는 증거물로서 사용되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우상이 아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미리 알려 주고 우상이란 것은 너를 위한 것이 다 우상이라고 말씀해 주어도 오히려 이 말씀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행할 수밖에 없는 자들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출애굽기 3장에서 바로 왕에 대한 말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미 바로의 행위가 결정되어 있습니다.
바로 왕이 어떻게 나올지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리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바로 왕은 하나의 배우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그 발악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하는 증거물로 이용될 뿐입니다. 즉 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소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영원불변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위해 바로 왕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린 버럭 화를 내지요.
그러면 내가 오늘 하루하루 결정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네요. 예배 오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돈 버는 것도 이 모든 것들도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이용될 뿐이네요.

그러면 나 가만히 있어도 되겠네요. 이런 불만을 막 쏟아 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신이 종이 아니라 주인 행세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히브리서 5장5절을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라고 합니다.

우리가 모세라면 어차피 바로 왕이 열 번째 이스라엘을 쫓아 낼 것이니 굳이 내가 고생할 필요 있겠느냐 하겠지요.
그런데 모세는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그 역할을 종으로서 제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종이라고 히브리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물론 마귀도 그렇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알지요. 자신이 종임을. 그러나 바로 왕은 모릅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바로 피 죽음입니다. 물론 이 피 죽음조차 차후에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부르심이 먼저 있었고 사명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중에 피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조차 자신이 원해서, 소망해서, 기대해서 된 경험이 아닙니다. 그는 그냥 언약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로 막 이용되는 자로 산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세를 보면 화나 나지요. 왜 알아서 좀 미리 아들 게르솜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만일 모세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주님은 다른 방식을 취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일은 인간의 열심과 행위를 부정하면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신실한 종이라고 하십니다. 즉 모세 자랑할 것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참으로 우리가 듣기에 싫은 말씀입니다.

우리 중에 자기 유익 구하면서 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남을 위해 사는 사람조차도 다 자기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다 죽기 때문입니다. 죽는다는 말은 죄가 있다는 말이지요. 이들은 스스로 부활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일하셨습니까?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로 언약을 다 이루셨습니다.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되신 예수님께서 자기 유익만 구하는 자들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고 다시 주님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을 철저하게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조치를 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십자가만 자랑하도록 삶을 펼치십니다.
마치 모세의 삶처럼 말입니다.

모세의 삶을 보면 모든 것이 우연일 뿐입니다. 그런데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그 우연적 삶이 우연적 삶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한 필연적 삶이었습니다.
로마서9장에 의하면 귀히 쓸 그릇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달리 바로 왕은 천히 쓸 그릇입니다.
로마서9장18절을 봅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말씀이라는 것은 이미 확정되었다는 말입니다.
달리 어떻게 우리의 행위로, 결심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서 교훈적으로 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닮으려고 하고 바울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래서 이름을 성경에 나오는 이름으로 많이 짓잖아요.

가룟유다라고는 절대로 이름 짓지 않겠지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내가 무엇을 행함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결정되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함부로 짓지 않고 비싼 돈 주고 짓잖아요.

성경말씀은 주님께서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을 증거하는 말씀이지 우리가 주님의 이루심을 어떻게 바꿀 수 있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시는 말씀 앞에 우린 십자가를 경유해서 이 말씀에 접근하고 십자가를 경유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우린 이 말씀에 접근금지 당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나 말씀 지킬 수 있어요라고 덤벼들게 되면 곧장 진멸의 대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간 백성들의 특징은 자기 행한 것이 없고 어린양의 피만을 자랑합니다.

'고린도전서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해 80  (0) 2016.08.02
강해 79  (0) 2016.08.02
강해 77  (0) 2016.08.02
강해 76  (0) 2016.08.02
강해 75  (0) 2016.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