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75
푸른 섬
2016. 8. 2. 16:19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장 4절
지금 고린도 교회에서는 서로 자랑 질 한다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자랑질 하는 내용을 보면 우리는 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갖고 자랑질 합니다. 주님이 주신 은사라고 하면 우린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행하는 것,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하는 은사만 은사라고 생각하기 쉽지요.
사람들은 그렇게 은사를 고정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가 받은 것이 특별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유별나게 남들이 받지 않은 은사를 받으려고 안달하지요.
그래서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지요? ‘너 이런 은사 받아 봤어. 못 받아 봤으면 말을 말어.’
분명 고린도전서 12장26절에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사람들은 오히려 고통 주는 즐거움, 함께 즐거워하지 않는 즐거움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태도는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그리고 은사라는 것은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자리는 십자가 지신 주님이 만드셨습니다.
마귀에게 사로 잡혔던 자를 주님이 사로잡으시고 그들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은사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은사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이 가진 것, 그것이 재물이 되었던 어떤 다른 것이 되었던 자랑할 거리가 없지요. 그런데 왜 지금 고린도 교회, 그것도 사도 바울이 목회했던 그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들 생각에는 교회란 사랑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처럼 사랑은 자랑하지 않으며 라고 하는 이유는? 그래 교회란 사랑하는 곳이지 자랑하는 곳이 아니야. 그러니 자랑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구나.
그래 말씀 듣고 이제 자랑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지. 이것을 결단하고 결심하라고 말씀을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갖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더 이상 자기 자랑하지 않았을 것이라 예상을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는고 하면 목사든지 성도든지 모두가 무슨 생각을 하는고 하면 아름다운 교회를 꿈꿉니다. 즉 말씀대로 사는 교회를 꿈꾸지요. 왜 이런 교회를 꿈꿉니까?
사는 것이 피곤하거든요. 사는 게 힘들고 피곤하니, 세상살이에 찌들리니 교회에서 만큼은 마음이 평안하고 더 이상 싸움이 없고, 경쟁이 없는 곳이기를 바랍니다.
주일날 교회 왜 나옵니까?
물론 다른 날도 나오시겠지만.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는 자기 마음 평안하기 위해서 나옵니다. 그런데 교회 왔는데 자랑질 해 보세요. 열만 받고 갑니다. 우리 얘가 이번에 공부 일등했어. 우리 얘가 이번에 좋은 대학 갔어.
우리 사업이 너무 잘 되고 있어. 보톡스 맞았는데 얼굴이 너무 예뻐졌어. 염색을 했는데 태후에 나오는 송혜교처럼 예쁘게 잘 나왔어.
모였다면 이런 소리를 한다고 해 보세요. 교회가 시끄러워요. 물론 이것을 즐기기 위해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고 , 절을 찾는 이유가 세상 물질과 건강을 얻기 위해서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와 달리 뭔가 신이 노는 자리에 함께 하고픈 마음도 있거든요. 그것이 뭔고 하면 말씀대로 사는 것 아닙니까?
물론 말씀대로 살아 결국 축복받겠다는 그 목적이 있습니다.
로마서3장27절을 봅시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사람이 자랑할 것이 있다는 말은 반드시 법과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뭔가 기준이 되는 법이 있고 그 법을 따로 행위를 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을 내 놓을 수 있잖아요.
자녀가 시험을 쳤는데 빵점 맞아 오면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없지요.
우린 어떨 때 자랑합니까?
사업이 망한 것을 자랑합니까?
좋은 직장 가지 못한 것을 자랑합니까?
거지처럼 사는 것을 자랑합니까?
이런 일을 자랑하는 사람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것을 자랑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지요.
그래서 받은 은사를 갖고 자랑한다는 말은 그 은사를 무엇으로 돌렸기 때문일까요?
바로 자기 행위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못 말립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의 본능입니다.
로마서4장2절에 보면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볼 때 얼마다 대단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아브라함은 자기 자랑 엄청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의롭게 하시는 방식은 이 자랑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의롭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2장 이하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우리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의 행위로 의롭데 하심을 받은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의 행위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아브라함의 행위는 부정되어야 합니까?
아브라함의 행위가 부정되어야 하지요.
여기서 우리가 오해 말아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필요 없다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행위가 부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브라함의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를 통해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는 자로 드러납니다. 즉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을 받은 자로 드러납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기 행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 행위는 자기 자랑을 위한 행위일지 몰라도 주님 앞에서는 자랑할 수 없는 행위, 즉 죄로 드러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부정한 행위를 통해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심을 보여주는 완벽한 증거물이 됩니다.
그러니 창세기 12장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 말씀대로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우린 이런 행위를 두고 아브람이 자랑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판단은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은 이것은 아브람이 부정당해야 하고 그 속에서 활동하시는 주님께서 주신 믿음만이 부각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창세기12장10절 이하를 보게 되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으로 내려갈 때 아름다운 아내 사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이 말을 듣는 사래도 우리가 보기에 불쌍하지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사래를 두고 성경은 뭐라고 표현하는고 하면,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벧전3:6)” 고 하십니다.
이런 사라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모습이라 평가를 내립니다.
우리들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평가 아닙니까?
그런데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브람이 아내 사래와 함께 애굽 사람들을 속였지요. 그것도 모르고 사래를 바로의 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덕택으로 아브람은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습니다. 아내를 팔아먹은 대가로 꾀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벌을 받아야 합니까?
아브람이 벌을 받아야 합니까 아니면 사래가 벌을 받아야 합니까?
놀랍게도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이 내렸습니다.
우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린 우리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누구 때문이라 생각합니까?
내 행위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모든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니 창세기12장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아브람과 사래 뿐만 아니라 사래의 몫으로 받은 모든 소유를 받아 부자가 되어 벧엘로 올라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아브람이 믿은 여호와의 이름은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아브람은 아브람 나름대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뒷받침 해주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환경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호와께서는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곧 선택받은 자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복을 주시는 방식입니다. 이 복은 앞서 말씀 드렸지요.
창세기 12장에서는 물질로 표현되어 나오지만 로마서 3장에서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일한 것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일한 것이 없다는 말은 아무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불법을 행했다. 죄를 행했다는 말입니다. 이 죄를 주께서 인정 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 곧 아브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은 처음부터 자랑할 거리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린 예수 믿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내가 예수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해서 내가 들어 믿게 되었지만 결국 믿은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출발점은 우상숭배 중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호수아24장2절을 보면 다른 신들을 섬기는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내셨다고 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관찰자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옳고 그름을 파악해서 자신이 옳은 것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 보니 그래 예수 믿으면 구원 얻겠구나. 예수 믿으면 도움되겠구나라고 생각해서 교회를 나옵니다. 이렇게 교회에 나오면 무엇이 살아 있는고 하면 자신의 결심, 자신의 행위가 살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을 들을수록 그 말씀은 자신의 행위를 더욱더 정당화하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가 더더욱 이해가 안 가는 것을 오늘 본문이지요. 성령을 받았는데 어떻게 은사를 자기 자랑으로 삼느냐고 말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구원에 있지요. 그러다보니 이미 구원받았고 성령 받았다면 은사를 자랑하지 않아야 정상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이 증거되려면 반드시 주님의 피가 증거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피가 증거되려면 죄가 흘러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을 자랑하지 아니하며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책망입니다. 나 이제 자랑하지 않아야지 백날 결심해도 자랑하지 않을 인간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돌아서면 자랑합니다. 물론 처음 은사를 받을 때는 자랑하지 않지요. 그런데 몇 초 지나지 않아 그것을 다시 자랑거리로 삼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조치하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십자가만 눈앞에 밝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오늘 말씀을 보면서 그래 나는 더 이상 자랑하지 않아야지라고 결심할 것입니다. 이렇게 결심해서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있을 수 없습니다.
결심해서 말씀을 지키면 반드시 행위를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십자가를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늘 과거로 돌리고 자신의 행위를 앞장세우는 자들입니다.
고린도 전서 1장28-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예레미아9장24절에 나오는 말씀의 성취를 말합니다.
예레마아9장 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5,26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깍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할례 받은 이스라엘이나 할례 받지 못한 이방민족 모두가 가 여호와의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말은 곧 어느 누구도 자랑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두 벌 받아야 하는 자들인데 무엇을 자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지금 고린도 교회에서는 서로 자랑 질 한다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자랑질 하는 내용을 보면 우리는 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갖고 자랑질 합니다. 주님이 주신 은사라고 하면 우린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행하는 것,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하는 은사만 은사라고 생각하기 쉽지요.
사람들은 그렇게 은사를 고정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가 받은 것이 특별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유별나게 남들이 받지 않은 은사를 받으려고 안달하지요.
그래서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지요? ‘너 이런 은사 받아 봤어. 못 받아 봤으면 말을 말어.’
분명 고린도전서 12장26절에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사람들은 오히려 고통 주는 즐거움, 함께 즐거워하지 않는 즐거움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태도는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그리고 은사라는 것은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자리는 십자가 지신 주님이 만드셨습니다.
마귀에게 사로 잡혔던 자를 주님이 사로잡으시고 그들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은사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은사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이 가진 것, 그것이 재물이 되었던 어떤 다른 것이 되었던 자랑할 거리가 없지요. 그런데 왜 지금 고린도 교회, 그것도 사도 바울이 목회했던 그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들 생각에는 교회란 사랑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처럼 사랑은 자랑하지 않으며 라고 하는 이유는? 그래 교회란 사랑하는 곳이지 자랑하는 곳이 아니야. 그러니 자랑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구나.
그래 말씀 듣고 이제 자랑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지. 이것을 결단하고 결심하라고 말씀을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갖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더 이상 자기 자랑하지 않았을 것이라 예상을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는고 하면 목사든지 성도든지 모두가 무슨 생각을 하는고 하면 아름다운 교회를 꿈꿉니다. 즉 말씀대로 사는 교회를 꿈꾸지요. 왜 이런 교회를 꿈꿉니까?
사는 것이 피곤하거든요. 사는 게 힘들고 피곤하니, 세상살이에 찌들리니 교회에서 만큼은 마음이 평안하고 더 이상 싸움이 없고, 경쟁이 없는 곳이기를 바랍니다.
주일날 교회 왜 나옵니까?
물론 다른 날도 나오시겠지만.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는 자기 마음 평안하기 위해서 나옵니다. 그런데 교회 왔는데 자랑질 해 보세요. 열만 받고 갑니다. 우리 얘가 이번에 공부 일등했어. 우리 얘가 이번에 좋은 대학 갔어.
우리 사업이 너무 잘 되고 있어. 보톡스 맞았는데 얼굴이 너무 예뻐졌어. 염색을 했는데 태후에 나오는 송혜교처럼 예쁘게 잘 나왔어.
모였다면 이런 소리를 한다고 해 보세요. 교회가 시끄러워요. 물론 이것을 즐기기 위해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고 , 절을 찾는 이유가 세상 물질과 건강을 얻기 위해서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와 달리 뭔가 신이 노는 자리에 함께 하고픈 마음도 있거든요. 그것이 뭔고 하면 말씀대로 사는 것 아닙니까?
물론 말씀대로 살아 결국 축복받겠다는 그 목적이 있습니다.
로마서3장27절을 봅시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사람이 자랑할 것이 있다는 말은 반드시 법과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뭔가 기준이 되는 법이 있고 그 법을 따로 행위를 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을 내 놓을 수 있잖아요.
자녀가 시험을 쳤는데 빵점 맞아 오면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없지요.
우린 어떨 때 자랑합니까?
사업이 망한 것을 자랑합니까?
좋은 직장 가지 못한 것을 자랑합니까?
거지처럼 사는 것을 자랑합니까?
이런 일을 자랑하는 사람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것을 자랑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지요.
그래서 받은 은사를 갖고 자랑한다는 말은 그 은사를 무엇으로 돌렸기 때문일까요?
바로 자기 행위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못 말립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의 본능입니다.
로마서4장2절에 보면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볼 때 얼마다 대단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아브라함은 자기 자랑 엄청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의롭게 하시는 방식은 이 자랑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의롭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2장 이하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우리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의 행위로 의롭데 하심을 받은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의 행위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아브라함의 행위는 부정되어야 합니까?
아브라함의 행위가 부정되어야 하지요.
여기서 우리가 오해 말아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필요 없다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행위가 부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브라함의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를 통해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는 자로 드러납니다. 즉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을 받은 자로 드러납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기 행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 행위는 자기 자랑을 위한 행위일지 몰라도 주님 앞에서는 자랑할 수 없는 행위, 즉 죄로 드러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부정한 행위를 통해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심을 보여주는 완벽한 증거물이 됩니다.
그러니 창세기 12장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 말씀대로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우린 이런 행위를 두고 아브람이 자랑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판단은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은 이것은 아브람이 부정당해야 하고 그 속에서 활동하시는 주님께서 주신 믿음만이 부각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창세기12장10절 이하를 보게 되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으로 내려갈 때 아름다운 아내 사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이 말을 듣는 사래도 우리가 보기에 불쌍하지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사래를 두고 성경은 뭐라고 표현하는고 하면,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벧전3:6)” 고 하십니다.
이런 사라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모습이라 평가를 내립니다.
우리들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평가 아닙니까?
그런데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브람이 아내 사래와 함께 애굽 사람들을 속였지요. 그것도 모르고 사래를 바로의 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덕택으로 아브람은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습니다. 아내를 팔아먹은 대가로 꾀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벌을 받아야 합니까?
아브람이 벌을 받아야 합니까 아니면 사래가 벌을 받아야 합니까?
놀랍게도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이 내렸습니다.
우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린 우리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누구 때문이라 생각합니까?
내 행위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모든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니 창세기12장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아브람과 사래 뿐만 아니라 사래의 몫으로 받은 모든 소유를 받아 부자가 되어 벧엘로 올라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아브람이 믿은 여호와의 이름은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아브람은 아브람 나름대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뒷받침 해주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환경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호와께서는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곧 선택받은 자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복을 주시는 방식입니다. 이 복은 앞서 말씀 드렸지요.
창세기 12장에서는 물질로 표현되어 나오지만 로마서 3장에서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일한 것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일한 것이 없다는 말은 아무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불법을 행했다. 죄를 행했다는 말입니다. 이 죄를 주께서 인정 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 곧 아브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은 처음부터 자랑할 거리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린 예수 믿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내가 예수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해서 내가 들어 믿게 되었지만 결국 믿은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출발점은 우상숭배 중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호수아24장2절을 보면 다른 신들을 섬기는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내셨다고 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관찰자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옳고 그름을 파악해서 자신이 옳은 것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 보니 그래 예수 믿으면 구원 얻겠구나. 예수 믿으면 도움되겠구나라고 생각해서 교회를 나옵니다. 이렇게 교회에 나오면 무엇이 살아 있는고 하면 자신의 결심, 자신의 행위가 살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을 들을수록 그 말씀은 자신의 행위를 더욱더 정당화하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가 더더욱 이해가 안 가는 것을 오늘 본문이지요. 성령을 받았는데 어떻게 은사를 자기 자랑으로 삼느냐고 말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구원에 있지요. 그러다보니 이미 구원받았고 성령 받았다면 은사를 자랑하지 않아야 정상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이 증거되려면 반드시 주님의 피가 증거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피가 증거되려면 죄가 흘러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을 자랑하지 아니하며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책망입니다. 나 이제 자랑하지 않아야지 백날 결심해도 자랑하지 않을 인간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돌아서면 자랑합니다. 물론 처음 은사를 받을 때는 자랑하지 않지요. 그런데 몇 초 지나지 않아 그것을 다시 자랑거리로 삼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조치하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십자가만 눈앞에 밝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오늘 말씀을 보면서 그래 나는 더 이상 자랑하지 않아야지라고 결심할 것입니다. 이렇게 결심해서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있을 수 없습니다.
결심해서 말씀을 지키면 반드시 행위를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십자가를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늘 과거로 돌리고 자신의 행위를 앞장세우는 자들입니다.
고린도 전서 1장28-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예레미아9장24절에 나오는 말씀의 성취를 말합니다.
예레마아9장 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5,26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깍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할례 받은 이스라엘이나 할례 받지 못한 이방민족 모두가 가 여호와의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말은 곧 어느 누구도 자랑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두 벌 받아야 하는 자들인데 무엇을 자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