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73

푸른 섬 2016. 8. 2. 16:18
사랑은 온유하며
고린도전서13장4절

종교인이라면 꼭 필요한 요소가 온유가 아닐까요?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을 온유라 합니다. 느낌 팍 오지 않습니까?

부활절을 맞아 모슬렘의 발을 씻어 주는 교황 같은 모습, 얼마나 예수님을 믿는 것 같습니까?
우린 이런 사람들을 보면 부처 같다고 하잖아요. 화난 사람을 부처 같다고 하지 않잖아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성질뿐만 아니라 표정조차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나이가 서른 살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 오십처럼 보였습니다. 요한복음8장 57절에 나옵니다. 얼마나 세상에서 찌들었으면 서른 살이 오십 살처럼 보였을까요?

이 본문이 참 재미있는 본문입니다. 우리들이 상상하는 예수, 여기 백년된 성당게 들어가 보면 예수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오래된 성당에 가면 언제나 만날 수 있지요. 그 얼굴이 어떤 모습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나이가 삼십 정도인데 오십이 되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지금이야 오십 살 이라면 청년처럼 보이지요. 저도 곧 오십이 되는데.

그런데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제 기억으론 환갑잔치 하지 않는 사람 없었어요.
빨리 죽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는 어떠했겠습니까? 공기가 깨끗해서 장수했겠습니까?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46.1세 정도라고 하고, 로마시대 평균 수명은 28세라고 합니다. 14세기 유럽이 38세라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얼마나 늙어 보였겠습니까?

우린 예수님이시니 늙지 않을 것이라 상상합니다. 예수님을 처음부터 내가 상상하는 신의 자리에 올려놓아 버렸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책에도 나오지만 진짜 온유한 모습이야 말로 예수님의 본모습이라 상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주님의 증인이라 하지 않고 속은 어떤지도 모르면서 겉모습만 온화하고 말투가 부드러우면 예수님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마태복음21장9절을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호산나의 뜻은 ‘이제 구원해 주소서’ 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온 주의 이름이라는 말은 본래 구약의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우리가 상상하는 바와 달리 전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4장1절에 보면 하와가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런데 놀랍게도 하와가 이해한 여호와는 자신이 생각하는 구원을 이루어주시는 여호와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하와가 말하는 여호와는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또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아들 이름이 아벨입니다. 허무라고 지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을 아들 가인을 통해 한 풀이를 해 주실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또 다른 아들이 태어나니 자신이 기대한 소망이 허무해 져 버렸습니다.

단수로 약속했다면 그 단수가 태어나야 하는데 복수가 되어 버리니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을 하시는데 하와가 상상하는 여호와를 부정하는 여호와로 일을 하십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한 가인이 허무한 아벨을 죽였습니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분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하와가 상상하는 그런 구원을 가져 오시는 분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의 소망을 담은 아들이 허무한 아들을 죽임으로 그 죽음 속에서 구원을 가져 오십니다.

이것은 구원자, 메시아를 기대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입니다. 이것 진짜 말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자를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린 자들이 구원자를 죽인다는 것은 우리들 생각에는 바보 같은 짓이잖아요.

그래서 우린 이런 상상하잖아요. 내가 예수님 당시에 살았다면 예수님 편에 섰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철저하게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와에게 아벨을 주신 이유가 같습니다.
너희들이 기대하는 구원은 지옥가야 할 자들이 상상하는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천국을 전하시는 분을 죽입니다.

여자의 후손의 등장은 늘 이런 식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의 바램을 늘 꺾어버리는 방식으로 여자의 후손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뱀의 후손은 어떨까요?

여러분 뱀의 후손이 어떤 자들이라 생각합니까?
우린 또 상상하잖아요. 영화나 책에 하도 많이 나오니까 예수님 이미지처럼 뱀의 후손의 이미지도 이미 굳어 버렸습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먼저 이미지를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에게서 나올 수 있는 뱀의 후손이나 여자의 후손의 이미지는 똑 같습니다.

나를 위한 자는 여자의 후손이고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은 뱀의 후손이 됩니다. 뱀의 후손이 성당에 그려진 그런 예수님 상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지요.

원수의 발을 씻어 주는 교황이 뱀의 후손다운 모습이라고는 상상도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귀의 자식들이 상상하는 뱀의 후손은 전쟁을 일으키고, 가난한 자를 도와주지 않고, 얼굴은 항상 찡그려 있고, 늘 분노하고, 짜증내고, 화낸다면 그런 사람이야 말로 뱀의 후손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행전 20장29,30절을 보면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 날 줄을 내가 아노라”

에베소 장로들에게 지금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 말을 들었다면 앞으로 사나운 이리가 들어 올 것이나 사나운 이리가 온다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지라고 결심하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사나운 이리가 사나운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7장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니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 동화를 보면 늑대가 밀가루를 발에 묻혀 아기 염소를 속여 잡아 먹잖아요. 물론 시계 속에 숨은 아기 염소로 인해 엄마가 자초지정을 다 알고 잠자는 늑대의 배를 갈려 아기 염소 구하고 뱃속에 돌을 집어넣었지요. 물론 늑대는 물 마시러 갔다가 물에 빠져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린 이런 동화를 읽으면서 어리석은 아기 염소처럼 속지 않아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반드시 사나운 이리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자기를 따르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양의 옷을 입었기에 그 속이 노략질 하는 이리가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상상하는 뱀의 후손은 우리가 상상하는 예수 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리가 우리의 재산과 생명을 뺏어 간다고 생각하지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리는 우리의 재산과 생명을 더욱더 보호해 주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돈을 빼가는 자들도 가득합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함께 지옥 가겠다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입니다. 물론 그 이리는 그 사실을 모르지요. 자기가 누구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2장1-3절을 봅시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였더라”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감히 나를 비방해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모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온유함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했습니까?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저들이 조롱할 때 어떤 식으로 대응하셨습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아요. 물론 알아듣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참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온유라는 것은 남에게 유익을 가져와야 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온유로 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했습니까?
주님이 개입합니다. 심판을 받습니다.

모세를 통해 드러난 온유한 모습은 결국 주님의 심판을 가져오는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은 심판 주 이시기 때문에 온유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보여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 받고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을 들은 베드로가 필사적으로 막을 때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기대합니까? 온유한 모습을 기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땅에 사는 죄인들은 성경말씀을 무조건 자신들이 갖고 있는 범주 안에서 단어를 해석해서 적용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갖고 계시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 언어를 자신들이 이해하는 범주 내에서 얼마든지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일관성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마태복음5장에서 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시편18편35절을 보면 “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47절을 보면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해 주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해 주시도다.” 너무 편애하는 하나님 아닙니까?

한편에게는 온유로 한 편에게는 보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 온유한 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보내 주신 자들에게 십자가 사랑으로 땅을 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거할 곳이 성령을 주셨습니다. 땅을 제공할 수 있다는 말은 곧 그분이 온유의 원천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랑은 온유하다’라고 했을 때 이 온유는 처음부터 십자가 지신 주님을 증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우리에겐 온유가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반박할 겁니다.
우리에겐 없습니다. 주님이 온유한 분입니다. 그 주님을 증거하는 자들이 온유한 자들입니다.

은사라는 것은 절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만일 선물을 소유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온유한 자가 아님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시편37편10-11절을 봅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것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당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이제 분명해 졌지요.

시편14편1-3절을 봅시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이 말씀에 다윗도 들어갈까요 들어가지 않을까요?

물론 다윗도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온유한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악인이 없는 땅을 차지할 인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온유한 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 만드시는 방식은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이시고 다시 살리시는 방식입니다. 혹 온유한 자가 보이시면 주님의 창조로 보시면 됩니다. 물론 그 새창조물은 온유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의 원천자이신 십자가 지신 주님을 증거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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