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71

푸른 섬 2016. 8. 2. 16:18
아무것도 아니요
고린도전서13장1-3
12장31절에서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해 놓고 하는 말이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겠다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역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들은 또 하나의 나만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이 말씀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어이없게도 내 주체를 더욱더 확고히 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내 주체를 허무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의 방언, 천사의 말, 예언하는 능력, 모든 비밀 모든 지식을 아는 것, 산을 옮길 만한 믿음, 모든 것으로 구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

우리에게 이런 것이 있다면 좋겠습니까 좋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묻는 내가 바보 아닙니까?

앞부분에 나오는 사람의 방언, 천사의 말, 예언하는 능력, 모든 비밀 모든 지식을 아는 것,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라는 것은 내 소유가 가능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나의 힘을 더욱더 쌓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꼭 하는 소리 중에 하나가 너 이런 은사 받아 봤니? 못 받아 봤으면 말 하지마. 뿐만 아니라 우린 이런 말에 왠지 내가 작아지는 느낌 들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린 본능적으로 신을 믿는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생각하는 신적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성령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이라는 것이 주릴 때 돌로 떡덩이 만드는 기적,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말씀에 예언한 대로 발가락 하나 다치지 않는 것, 세상권세와 영광을 갖는 것. 이게 우리들이 평소 갖고 있는 소원이잖아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이것을 못 가져야 지금 발악하고 있는 신세들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시험을 다 거절하셔놓고 왜 우리에게 다시 이런 은사를 주시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방언, 배우지도 않았는데 외국말 줄줄 한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그저께 물건하나 사는데 여기서 십년 이상을 살았는데도 단어 하나 못 알아 들어 바보 같은 짓을 할 뻔 했습니다마는 배우지도 않았는데 일어, 영어, 프랑스어를 잘하면 이것 보다 좋은 게 어디 있습니까?

수고 없이 얻어지는 게 있다면 이보다 좋을 순 없잖아요.

천사의 말을 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겠습니까? 옛날에 대학원 다닐 때 경건회시간에 어떤 강사와 와서 자기는 방언 통역한다고 방언하는 사람 일어서 보라고 했어요. 그러자 어떤 여학생이 일어서 중얼거렸는데 그 강사가 통역을 했어요. 물론 그 통역내용은 시편을 인용한 내용이었어요.

사람들이 놀랐겠지요. 사람들에게 이런 게 먹힌다는 말입니다.

예언하는 능력은 어떻습니까?
한국의 불교 중에 천태종파가 있는데 그 최초의 절이 구인사라는 절인데 거기에는 하룻밤에 삼천 명이 방언을 하고 예언를 한답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인기 최곱니다.
그곳을 방문한 어떤 사람이 왜 그 절에서는 염불만 하느냐? 즉 왜 기복, 이 땅에서의 축복만 기도하느냐 내세, 영생을 위해 기도해야 되지 않느냐고 탄식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는 그것나 그거나 똑 같이 자신들을 위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얼마나 인기입니까?

예언한다는 사람 있으면 줄 서잖아요. 돈 주면서.

모든 비밀 모든 지식을 안다면 달리 말해 성경의 달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성경의 달인에게 말씀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소망 아닙니까?
그래서 찾아 나서잖아요. 성경을 좀 더 많이 아는 사람, 지식이 해박한 사람을 찾아 스승으로 삼고 싶지 않습니까?

디모데후서4장3,4절을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우린 세상 지식만 가득 채우는 것에 대해서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갖고 있어도 이것 또한 십자가의 원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것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던 무엇이든 많이 알고 똑똑한 사람을 좋아하지요.
며칠 전부터 알파고와 이세돌이 바둑경기를 했습니다. 누가 이기기를 바랍니까?
구글 직원 빼고는 이세돌을 응원했을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글 직원들은 알파고를 통해 때 돈을 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며 자신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세돌을 응원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알파고를 얼마나 갖고 싶어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앞으로 모든 사람이 이런 뛰어난 인공지능을 휴대폰처럼 들고 다니면서 누가 그것을 잘 활용하느냐의 시대로 접을 들 것이라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내 소유가 되지 않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의 지식이 되었든지 성경 지식이 되었든지 사람들의 관심은 십자가의 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축적에 있습니다.
돈도 많이 쌓으면 좋듯이 지식도 그러하다고 모든 상황이 밀어 붙입니다. 여기에 나도 동조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이 뭐가 문제냐. 성경을 잘 아는 것이 뭐가 문제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말하는 자체가 헛소리입니다. 그것이 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태도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 얼마나 갖고 싶습니까?
제가 오래전에 이런 예를 들었지요.
어릴 때 부흥회를 하는데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우리가 믿지 않아서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저희 집에서 바로 보이는 무학산을 옮겨달라고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습지요? 그런데 우리 마음속엔 이런 믿음을 갖고 싶어 합니다.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린 또 챙기려고 합니다.

그래 사랑도 있고 이것도 가지면 되지 뭐. 그런데 이런 태도 자체가 사랑이 없는 태도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이런 생각 자체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사랑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한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얼마다 대단한 일입니까?

내게 있는 모든 것, 일부분이 아니라 모든 것, 꼭 주님이 칭찬한 과부의 두 렙돈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조차 누구를 위한 구제일까요?

뿐만 아니라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줍니다.

여러분 이것이 일제시대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옥살이 하고 죽임을 당했습니까?
이런 것들은 다 자기 자신을 위한 죽음이요 고통이라 칩시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데 문제는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이 시켜도,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렇게 함으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 내가 목숨을 내어 놓겠다. 교회를 위해 내가 희생하겠다고 나서는 자들은 모두 이 부류에 들어갑니다. 아무리 자기 몸을 내어 주어도 자신에겐 어떠한 유익이 없습니다.

유익이 없다는 말은 오히려 해롭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23장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않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르침은 그들의 말은 오직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들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어떻게 그 사람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의 마음은 그 모든 행위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 즉 자기 자신의 이름을 위한 행위가 됩니다.

마태복음23장15절을 보면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목숨을 내어 놓는 전도, 선교여행을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표현이 재미있지요.

천국 보내기 위해서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닌 것 아니라 교인 한 사람 얻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고 하십니다.
오늘날 교회와 어떻게 그리 똑같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헌금 많이 바치도록 하기 위해 전도한다는 말입니다.

겉으로면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 같지만 결국 이 모든 행위들이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기 위해, 자기 정당성을 위해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사복음서를 지났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서기관들에 바리새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잘 못되었다고 하실 분도 있겠지요. 그러니 이런 태도 자체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태도입니다.
우린 병자가 아니니 의원이 필요 없습니다라는 말이지요.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교회이지 자신의 의로움을, 자신이 주님 안에 있는 자임을 증거하라고, 자기 자랑하라고 세운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런 태도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의인 아벨의 피부터 성전과 제단사이에서 죽은 바라갸의 아들 사갸랴의 피까지 의로운 피를 이들이 흘리게 했습니다.
아벨의 경우에도 제사와 관련되어 있지요.
성전과 제단 사이라는 말씀에도 제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 아벨과 사갸랴가 제사 때문에 피를 흘려야 합니까?
그것은 가인과 저들이 드리는 제사는 자기 의를 위한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 눈치 보는 제사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위해,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 제사 드리는 그들이 아벨과 사갸랴를 죽였습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사기8장에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 왕들을 물리치고 뺏은 금으로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에봇은 대 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 모세를 통해 만들라고 하신 옷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이 에봇을 왜 만들었을까요?
주님은 기드온이 에봇을 만든 것에는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에봇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이것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사사기 17장에서는 에봇을 만든 이유가 노골적입니다.
5절을 보면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기드온의 경우에는 전쟁의 승리를 여호와께 돌렸다면 이제는 에봇을 자기 집안을 위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음란히 섬겼다는 의미가 이런 의미입니다.

우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은사도 이와 같습니다.
결국 주님이 주신 것을 인간들은 자신을 위한 것으로 변환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걷어 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부적인 것들을 갖거나 아니면 내공이 깊어 자기 목숨을 타인을 위해 내어 주고, 모든 재산을 구제한다고 해도 인간들은 이것조차 자기를 위해 행하는 자들로 드러납니다. 이 속에서 주님은 자신이 세우신 교회를 만드십니다.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았다면 십자가의 피 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피를 전하라고 주신 돈, 권력, 힘, 자식, 아내, 남편, 직장 등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지금까지 배운 성경지식이 아무것도 아닌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요라고 하면 누구를 위해 이런 말을 한 것입니까?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자신의 피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십자가에 피 흘리신 분만이 오직 유일한 주님이심을 증거하시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왜 주님의 피만 증거되어야 하는지를 은사를 통해서 그 은사를 부정하시는 방식으로 교회를 다루십니다.

주님이 주신 모든 것은 내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피를 전하기 위한 아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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