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68

푸른 섬 2016. 8. 2. 16:16

한 성령을 마심
고린도전서12장12-13
은사란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4장7,8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성도의 출발점은 은사가 아닙니다. 은사를 받기 전에, 선물을 받기 전에 사로잡혔던 자들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사로 잡혀 있습니까?

마태복음12장22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외칩니다. 물론 그들이 보는 시각은 역사적인 시각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 싶으니 구약에 예언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얼마 있지 않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합류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안 되잖아요. 그들은 내심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예수님을 얼마든지 믿을 수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에 대해 한 무리는 다윗의 자손이라 하고 다른 한 무리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비꼽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에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사람들을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사람이라 말하지 못합니다. 철저하게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연구한 말씀에 근거하면 예수님의 이런 행위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 행위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셨습니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런 것은 드라마나 동화에나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문제는 귀신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 나오듯이 눈멀고 말 못하면 귀신들린 사람입니까? 그러면 눈 멀지 않았고 말 잘하는 사람은 귀신 들린 사람이 아니겠네요?

요한복음9장을 보면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을 때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9:39).”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쳐주신 것은 심판행위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맹인을 고쳐주는 것을 심판으로 봅니까? 기적 하나 행한 것으로 보잖아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비꼬는 것이지요.
자신들이 맹인임을 알면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곧 자신들은 맹인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님 말씀이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당신이 맹인 고친 것이 무슨 심판이냐는 것입니다. 그냥 환자 하나 고쳐준 의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
맹인이 되면 죄가 없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맹인이 죄를 용서 받았지요. 맹인은 주님의 용서함을 받는 자입니다. 그러나 맹인 아닌 자는 용서함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자에게 무슨 죄를 용서합니까?

다시 마태복음12장으로 가 봅시다.
눈 멀고 말 못하는 자만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자들이 귀신 들린 자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리새인들 눈에는 예수님의 이런 행위가 귀신의 졸개로 행하는 행위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제가 지난 주 어떤 집단에 대해 언급했지요. 그런 집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해서 병이 낫기만 하면 다 주님의 일이라 하지 않습니까? 병 고치지 못해서 안달난 자들이 오늘날 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수준은 무당수준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판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위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쳤다고 비난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과 코드가 안 맞아요. 아무리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마귀의 종노릇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마귀의 졸개임을 알지 못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졸개라는 표현까지 씁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가장 평범한 예로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마12:25,26).”
이 말씀이 이해됩니까?
그런데 다니엘서를 보게 되면 나라끼리 서로 분쟁하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맞지 않는 것이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도 나라끼리 분쟁하는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남한과 북한이 지금 분쟁하잖아요. 하나가 안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이 나라를 짐승이라 하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탄이 보입니까? 바리새인들 눈에는 예수님이 사탄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 입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눈에는 세상이 아무리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하나 되지 않더라도 그 모든 것 조차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더욱더 신뢰하도록 만드는 작업이라는 말입니다.

27절을 보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 어떤 사고를 갖고 있는 지를 지적하십니다. 자기 아들들이 하면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았고, 예수님이 하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판단합니다.

그들의 판단 기준은 말씀이 아니라 자기 혈육입니다. 달리 말하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지지하고 위해 준다면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판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너희들은 강한 자에게 결박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9절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예수님 자신을 아주 힘이 센 강도에 비유하십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비유 아닙니까? 예를 들어도 무슨 이런 심한 예를 드느냐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의 전형적이 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바리새인 너희들 입에서 나온 말대로 너희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종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30절에 너무나 일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무슨 이런 말이 있습니까?
자신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눈멀고 말 못하는 자를 고쳤다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고 나와 함께 모이지 않는 자는 나를 헤치는 자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내심 무엇을 기대합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납득이 되도록 자신의 행위를 설명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막무가네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판단이 더 옳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혼자고 바리새인들은 그 숫자가 더 많잖아요.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은 궤변이라 할 것입니다.

무조건 예수님 편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다 강한 자에게 결박당해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에베소서 4장으로 가 봅시다.
사로 잡혔습니다. 누구에게 사로 잡혔습니까?
에베소서2장2절을 보면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마귀에게 사로 잡혔다는 말입니다.

성도란 은사를 받기 전에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마귀의 종노릇했습니다.
마귀에게 사로 잡혀있던 자를 주님이 그 마귀를 결박하고 그곳에서 뺏어 와서 주님의 것으로 사로잡았습니다.

로마서6장에 보면 죄의 종노릇 하다가 의의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란 처음부터 자율권이 없었습니다.
성령이 오기 전에는 죄의 종노릇, 즉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돈을 벌고, 자식을 키우고, 사업을 하고, 정치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짓들이 다 마귀의 종노릇하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들이 하는 모든 짓거리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말입니다.
우린 오해를 합니다. 의의 종이 되었으니 이제 나로부터 죄만 나오는 자가 아니라 의가 흘러나오는 자가 될 것이라 예상합니다.

그래서 의가 흘러나온다는 것이 무엇일까 나름 생각하고 말씀을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을 연구한 결과가 무엇일까요? 바리새인이 행했던 행위들, 즉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삶을 강력한 마귀의 종노릇하는 삶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짓이 이런 짓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고, 방언하고, 통역하고, 병을 고치고, 예언한다고 난리 법석을 떱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의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진짜 의의 종은 눈멀고 말 못하는 자가 예수님의 고침을 받았음을 증거하는 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은 강한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 강한 자를 사로잡고 그곳에서 빼 내어 주님의 것으로 사로잡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자가 의의 종입니다.
이것이 선물입니다. 이것이 은사입니다.

은사가 임하면, 주님이 주신 선물이 임하면 자기를 부인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냥 선물, 은사를 주셨다고 하면 될 텐데 왜 사로 잡힌 자를 사로잡으시고 선물을 주셨다고 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사로잡힌 흔적이 없으면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어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구출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그들은 죽음을 피했습니다. 실상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과 함께 자신들이 죽었고 이제는 그 죽음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와께서 의도적으로 홍해길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 뒤엔 바로의 군대가 그들 앞엔 홍해가 가로 막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미 죽었으니 죽자라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되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살고 싶다고 하지요. 그래서 원망합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런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희는 어린양과 함께 죽었고 그 피로 산 자들임을 그들로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홍해바다를 맨땅처럼 걸어서 건너게 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원망 않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줄 것을 믿는다고 우기겠지요. 그런데 이 땅에 살면서 그렇게 믿는 자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믿는 자가 있다면 그에겐 십자가가 필요 없는 자입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원망 나오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은사를 주셨습니다.
홍해를 맨 땅으로 건너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 선물은 그들의 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선물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받은 모든 것이 은사입니다. 선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선물을 우리들이 원치 않는 곳으로 인도하시면서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은사, 이 선물은 무엇을 고발하면서 드러날까요?

우리의 죄를 고발하면서 주어집니다. 우리는 홍해바다는 건너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밥 먹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옷 입고, 신 신고 다니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사는 이것을 고발하면서 다가옵니다.
왜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성도를 이 땅에 살리시는 이유는 유월절 죽임당한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라고 살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로 살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린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죄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의가 흘러나옵니다. 십자가가 증거 됩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우리 한 교회 다닙니다. 모두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린 한 몸입니다. 그러니 서로 무시하지 말고 사랑하며 삽시다. 이것이 일반 교회에서 하는 설교 아닙니까?

아니면 아직도 성령세례 못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성령 세례 받읍시다. 성령 세례 받는 비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성령이 만드시는 몸을 자신들이 마음대로 만들어 내고 마음대로 그 결과물을 조작해 냅니다. 그러니 이런 모습이 바로 강력한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모습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말씀은 믿어지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모습이 성령의 세례를 받아 한 몸 된 증거물입니다.

몸,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는 자들은 성령 받은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더라도, 그들 숫자를 헤아릴 수 없더라고 그 많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죽임당한 어린양만 자랑합니다. 주님에 의해서 강력한 힘을 가진 자로부터 빼냄을 받은 흔적을 날마다 가진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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