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66

푸른 섬 2016. 2. 5. 11:45
끌려다니는 인생
고린도전서12장1-3
신령한 것이라고 말씀하니 사람들은 이 신령한 것을 이 땅에서 사용하는 역사적 언어로 해석합니다.
그러다 보니 튀어 나오는 것들은 역시 인간을 위한 것들 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령한 개념은 무조건 마귀적이라는 말입니다.

2절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여기에 있는 우리들은 이방인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변에 한번 물어 보세요.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끌려 다닙니까?
이것 주인행세 한번 못해보고 개가 목줄 때문에 질질 끌려 다니는 꼴입니다.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중에 어느 누가 이것을 인정하겠습니까?
나의 꿈이 이러하기에 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것이다라고 하지 어느 누가 이렇게 사는 것이 우상이 끄는대로 끌려 다니는 꼴입니다라고 할 사람이 있을까요?

우상을 만든 주인공이 나인데 내가 우상을 끌고 다니지 결코 우상이 나를 끌고 다니지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지요.

이들 눈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상도 눈에 보이지요. 자기 자신도 눈에 보입니다. 그러니 내가 주체가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항상 내가 모든 것을 끌고 다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께서는 그렇게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신령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들이 상상하는 그러한 힘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전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렇게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가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고 판단합니다.

에베소서2장2절을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주님의 판단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사는 자체가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을 통해 그 영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신령한 영이 이끄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 이끄는 삶입니다.

이 세상 풍조가 어떻습니까?
요한계시록18장7절을 보면 나옵니다.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삶이 이 세상 풍조입니다.

이것을 디모데 후서3장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한마디로 자기만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으로 가져오면 누군가에 끌려 다닌다는 말입니다.
마귀에게 끌려 다니는 특성이 바로 자기밖에 모르는 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6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의 몸에서 무엇이 펼쳐집니까?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런 일이 결단코 주께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왜 이런 행동을 할까요?
자기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모를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해 관심 없습니다.
오직 자기가 바라는 예수이기를, 주님이기를 소원했지요.
그러니 그런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고 삼일에 부활한다고 하니 이것은 미칠 지경입니다.

삼일에 부활한다는 것도 역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꾸며낸 하나의 상상일 뿐입니다. 누가 경험해 봐야 알지요.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예수님이 잡혀 죽는다면 나는 뭐가 되느냐 말입니다.

마태복음26장에서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증거를 조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이 안 맞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역사에 살고 있는 사람이 질문을 하면 역사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적합하게 대답을 해 주어야 하는데 영 딴 소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지금 잡혀 죽게 되었는데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판단을 내리겠습니까? 예수님을 보면서 비웃을 겁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그리스도, 구세주가 아닙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반드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인정해주고 나를 지지해 주고, 심지어 나에게 높은 자리 한 자리까지 주시는 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 뿐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뿐인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이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왜 불가능합니까?
그 배후에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마귀가 끄는 대로 끌려 다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도 자기가 사탄인줄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탄이 십자가 앞에서 그 정체를 제대로 드러납니다.
십자가 지시는 예수님 앞에 인간들이 바라는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때려 놓고 누가 때렸는데 맞추어 보라는 겁니다. 그걸 맞추는 정도가 되면 선지자로 인정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구약선지자중 엘리야와 엘리사가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그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정말 말 뿐이었습니다.

삼일동안 음부, 지옥에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삼일만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부활이 그 시대에 어떤 영향도 못 끼쳤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같으면 뉴스특보로 보도될 만한 사건이 아닙니까? 40일 동안 땅에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부활을 보여주신 대상은 오직 성령 받을 자들로 국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같으면 부활하셔서 40일간 계셨다면 헤롯왕이나 본디오 빌라도에게 한번 보여주면 얼마나 전도가 잘 될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전도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한 자들은 심판의 자리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 자리를 절대로 심판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받은 사람의 눈에만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구속받은 자들을 사용하셔서 너희들은 심판 받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이 속에서 심판 속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설교를 통해 갈라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증거물들이 갈라짐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십자가 사건으로 확정된 일을 추후적으로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가 십자가 사건에 어떠한 보탬도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의 전도나 회개, 움직임, 이 모든 것들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들을 보여주는 증거물들입니다.

복음을 전했을 때 믿는 자가 생기는 것도 이 속에 포함됩니다. 그러니 그 믿는 자가 만일 내가 믿어서 구원 얻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달리 말하면 그 사람은 사탄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자입니다.

사도바울을 통해 주님께서 신령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왜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 다녔다고 말하는지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3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는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것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주라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그들은 성령 받은 사람이 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을 향해서 호의를 보이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과연 성령 받은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했을 때에는 자기 자신이 누구에게 질질 끌려 다녔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의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의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은 의의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죄의 종이란 말은 죄만 보여주는 증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의의 증인은 어떻게 의의 증인으로 살아갈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죄의 종임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의의 증인이 됩니다. 그래야만 십자가 지신 주님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 속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의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경우입니다.

이미 고린도교회가 교회인데 왜 자꾸 과거를 들추느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성경을 주신 이유는 고린도 교회를 제대로 만들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린 여전이 누군가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이것조차 주님께서 십자가를 전하게 하시기 위한 조치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도는 예수님은 주님입니다라는 고백을 한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언가에 밀려 다니면서, 끌려 다니면서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49장3절을 보겠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십자가의 증인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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