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62

푸른 섬 2015. 12. 20. 16:34

 

해로운 모임

고린도전서 1117

주님이 세우신 교회라면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책망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보면 서머나 교회를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 교회가 책망을 당합니다. 물론 칭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목사들이,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그 본색을 드러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 싶은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행위의 완벽함을 통해 하나님께 칭찬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비록 제가 하나님과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으니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은 되지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하나님 아들의 방문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고대하는 메시아는 자신들과 한편 먹을 수 있는 메시아라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145절 이하를 보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만일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고 하고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 하지 않고 베들레헴 사람 예수라 했으면 어떠했을까요?

 

그러면 아마 빌립의 말을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믿음은 가짜믿음이겠지요.

 

진짜 믿음은 예수님께서 만나 주시는 믿음만이 진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나 주시지 않는 믿음은 가짜믿음입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자신이 한편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니고데모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하시지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지도자로 불리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판단할 때에는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예수님에 대한 접근 방식이 어떤 방식입니까?

기본은 구약 말씀을 깔고 있지요. 그런데 그 말씀을 어떻게 적용합니까?

자신을 반드시 경유하여 적용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면 자신이 구약 말씀을 알고 있으니 그 말씀을 근거로 하여 그 말씀에 합당한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이 메시아라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님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뭐가 문제가 있습니까?

아마 누가 생각해도 이들의 사고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마주치니 이들의 사고가 문제 있음이 드러납니다.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을 판단하는 자체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망 받는 꼴이 됩니다.

말씀을 근거로 한 자체가 문제 있음으로 드러납니다.

 

문제는 성령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고 하면 난 책망 받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머나 교회를 좋아해요. 그래서 이름을 지을 때 서머나 교회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자신들의 교회는 책망 받지 않는 교회가 되겠다는 것이지요.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하는 짓과 어쩜 그리 똑 같은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들 눈에는 다른 교회가 한 몸으로 안 보이는 모양입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한 몸입니다. 그러니 그 몸은 따로 나눌 수가 없습니다.

몸은 오직 주님 되신 예수님만 전합니다.

그렇다면 에베소교회를 따로 떼어 내어 생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서머나 교회만 따로 떼 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고린도교회만 떼어 내어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에베소소를 읽은 에베소 교회만 떼어 내어 생각할 수 있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만 따로 떼어 내어 우린 데살로니가 교회를 본받자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주님의 말씀은 자기 취향에 맞는 것 골라 먹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성경말씀을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순종하며 살겠다는 것 밖에 안 되잖아요.

모든 말씀은 주님을 전하며 따라서 모든 말씀이 주님의 몸에 부합한 말씀이 됩니다.

 

그러니 서머나 교회만 따로 떼어 내어 그 교회처럼 되자는 사고방식 자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야곱의 죄를 자신의 죄로 보지 않고, 다윗의 죄를 자신의 죄로 보지 않는 유대인들 말입니다.

자신들은 그들의 죄를 짓지 않고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니 분노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서머나 교회처럼 되기 위해 그런 이름을 짓고 말씀대로 산다는 교회에 당신들은 죄인이야라고 해 보세요.

그러면 네가 뭔데, 네가 예수님이라도 되느냐고 분에 분을 낼 것입니다.

 

이런 모습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산다는 인간치고 자신을 죄인이라 하는 자 없습니다. 이들에게 말씀은 자신들이 골라먹는 말씀밖에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요한복음 167,8절에서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보혜사를 보내 주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성령 받습니까? 사람들은 이 본문을 요상하게 적용합니다.

성령 받으면 타인이나 세상을 향해 책망할 것이라고 이 본문을 해석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은 당사자가 성령의 책망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책망을 받으면 세상은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문제는 세상은 절대로 책망을 받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성도는 성령의 책망에 아멘하지요. 책망이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가 됩니다.

 

그러나 성도 아닌 자는 성령이 없기 때문에 이런 책망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옆 사람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해도 그들에겐 책망이 안 됩니다.

성령을 주님께서 주셔야 책망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주님의 창조능력입니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책망을 듣기에 주님의 교회입니다. 책망을 듣기에 어린양의 피만 자랑합니다. 책망을 듣기에 어린양의 피만 자랑하다 죽습니다.

짐승에게 짓밟힙니다.

 

짐승은 책망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살잖아요. 돈이면 최고잖아요. 권력 있으면 최고잖아요. 아쉬운게 뭐가 있습니까?

십자가. 그거 믿어주면 되지라고 합니다.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고 말 해 주지요. 그런데 십자가만 자랑하지 않습니다. 말이야 누가 못합니까?

이들에게 십자가만을 전해 보세요. 싫어합니다.

 

분명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 해 놓고 십자가 복음은 싫어해요. 그러니 이들의 이런 신앙은 니고데모 같은 신앙 태도지요.

 

못 알아 듣습니다.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 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시면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면 되는데, 처음 행위가 뭐지. 그래 내가 처음 예수님 믿었을 때 그런 행위를 말하는 것이지. 그럼 그렇게 살아야지라는 식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처음 행위는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주님이 만드신 처음 행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지요.

 

말씀을 듣고 죽임당한 어린양을 바라보아야지 말씀을 듣고 내가 지키겠나이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고 합니다.

우린 이 말씀을 들으면 해로우면 모임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아는 자들끼리 모여 보세요. 모이면 해롭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어 놓는 것이 내가 기대하는 것과 다르게 내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럴 바에야 모이지 말고 나 혼자 신앙생활하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혼자 신앙생활하면 좋습니다. 싸울 일 없습니다. 짜증 낼 일 없습니다. 꼴 보기 싫은 일도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죄를 모르지요.

죄를 안다고 해놓고 죄를 다 감추어 버렸잖아요. 그러니 책망 받을 일이 없어집니다.

 

칭찬받지 못하는 교회, 유익이 되지 못하는 모임, 해로움만 가져오는 모임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입장입니다.

교회란 주님의 칭찬을 받는 유익이 되는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지요. 쉽게 말하면 내가 꿈꾸는 모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또 어떤 사람들은 모이는 것이 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러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 의미가 아니지요.

 

히브리서313절을 보면 매일 피차 권면 하라고 하시지요.

권면하라고 하면 우린 상대에게 잔소리 하려고 덤벼드는데 그런 의미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함께 사는 자체가 피차 권면하는 것입니다.

말씀순종하지 않아서 죽잖아요. 그 자체가 권면 받는 것입니다. 찌지고 볶고 싸우는 자체가 피차 권면하는 것입니다. 팅겨 나가 삐져 나가는 것이 피차 권면하는 것입니다. 물론 권면 받는 사람은 따로 있지요.

 

들을 사람만 듣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된다면 그는 권면 받지 않는 자가 되어 버리지요. 그 모습을 보면서 성도는 권면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당연히 칭찬받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이런 이야기 처음 듣지요. 물론 주님의 교회는 칭찬받는 교회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칭찬받는 교회가 됩니까?

 

칭찬받지 못하는 교회, 유익 안 되는 교회를 통해 십자가만 전하기에 칭찬받는 교회가 됩니다.

책망 받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책망 받는 교회만이 십자가의 피만을 전합니다.

 

그렇지 않는 교회는 자기 교회를 전하지요. 오늘날 이런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다 자기 교회 전해요.

십자가 이야기 하는 사람 없습니다.

 

책망 받고 싶어 하는 사람 없어요. 십자가만 전해도 자기 교회 욕하는 줄 알고 짜증냅니다.

다시는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지요.

 

우리 모임은 칭찬받지 못하고 , 유익이 되지 못하고 , 서로에게 해로운 모임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모임이 복 받은 모임이요 칭찬받는 모임이요 유익한 모임이요 해롭지 않은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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