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창세기32:13-20

푸른 섬 2007. 7. 16. 12:38
 

다급한 상황에서

창세기32:13-20

야곱은 지금 다급합니다.

기도를 한 후에 그가 취한 행동은 역시 그의 이름 야곱 답게 행동을 취합니다.

형 에서를 위해 예물을 택합니다.

암염소가 이백, 수염소가 이십, 암양이 이백, 수양이 이십,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 암소가 사십, 황소가 열, 암나귀가 이십과 그 새끼가 열. 정말 어마어마한 수의 예물입니다.


창세기30장 43절에서 말씀하신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는 말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32장23절에 보면 그 소유도 건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 아직 남은 재물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야곱을 볼 때 결코 자신이 이룬 재물을 모두 형 에서에게 넘기기를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은 자신의 고난과 수고에 대한 댓가라는 것이지요.

창세기31장42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라반에게서 뺏앗아서 주신 것이라고 31장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다 날려 버리시기에 하겠느냐는 마음이요, 자신의 수고의 댓가를 모두 형에게 줄 마음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그는 많은 양의 예물을 준비하여 세 떼로 나누어 출발 시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부탁합니다.

17,18절입니다.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 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그리고 둘째 셋째 각 떼를 따라 가는 자에게도 동일한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20절 하반절입니다.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야곱이 노리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푸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삶을 돌아 보면 그가 하는 삶 모두를 하나님께서 지지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셨고, 그가 취하는 방식도 하나님께서 지지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금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기도했지 않습니까?

어제 본문이지요.

9-12절입니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기도를 얼마나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근거로 기도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왜 이런 기도를 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려면, 나의 씨로 바다의 셀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려면 자신이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자신과 자신이 죽어 버리면 어떻게 하나님이 약속이 이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기도한 후에 여전히 평소 자신이 하는 대로 방법을 씁니다.

예물로 형의 감정을 풀고 형을 만나겠다는 것이지요.

궁극적인 것은 형의 감정을 푸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남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식으로 야곱을 볼까요?

그 이유는 우리들이 아브라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어떻게 낳았습니까?

인간의 방식으로 낳았습니까?


아니지요.

인간의 방식으로 낳은 아이가 누굽니까?

이스마엘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어떻게 주셨습니까?


창세기18장1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그런데 25장1-4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은 후 후처를 취하여 자식을 낳습니다.

그러니 문제는 사라지요.


여자의 경수가 끊어지면 아기를 못낳습니다.

지금 경수가 끊어진 할머니가 아기를 가질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이 상태로 몰고 가신  후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의 말씀, 네 자손이 뭇별처럼 많을 것이라는 말씀은 결국 누가 이루신다는 말씀입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부정하신 후 인간을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지금 야곱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전히 아브라함이 행했던 그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셨으니 내가 살아야, 내 가족이 살아야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가 만들어낸 방식이 세떼를 나누어 형의 마음을 누그러 뜨리는 것입니다.


정말 야곱적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런 극한 상황을 만드셨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맞게 하신 것이지요.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되니 야곱은 지금껏 자신이 살아온 방식의 총괄편을 꺼집어 냅니다.


그 방식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자신의 생존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고, 자신의 수단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이 되어 주셨다고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야곱편이 되신 것은 결코 야곱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이 언약성취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언약성취를 하시려면 야곱이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야곱이 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을 통해 보았듯이, 인간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언약을 성취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런 상황으로 몰아가실 것입니다.

어떤 상황말입니까?

극한 상황, 죽음의 상황과 같은 상황말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다시 야곱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성경말씀 끌어당겨 자신이 살고자 하는 방식을 취해야 할까요?


마태복음 10장37-39절에서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살고자 하기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사는가?

묵숨을 잃기 위해 살아가는 자입니다.


마태복음10장28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성도가 두려운 것은 자신의 몸이 죽는 것이 아니라 주님, 즉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주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야곱과 같은 절박한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떤 태도로 살아갈까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주님이 이루심을 믿는 믿음 말입니다.


그러니 절박한 상황에서도 성도의 관심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증거하게 해 달라고 정말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이 상황을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도 십자가의 은혜, 즉 몸과 영혼을 멸하시는 주님을 두려워 하는 삶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우리의 힘으로 믿을 수 없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말씀입니다.

주님만이 이 말씀을 성도 가운데 이루십니다.


성도는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안됩니까?

이런 질문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가 다 이런 상황이 되면 야곱처럼 기도하고 자신의 방법을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회개케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은 주님이 다 이루심을 믿는 자로 살게 하시고, 내가 정말 위급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베푸신 풍성한 사랑을 기억하며 그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자로 살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음의 위기를 맞았을 때 무슨 기도를 했습니까?

저놈들 돌 들지 못하게 힘을 빼 주소서라고 했습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예수님처럼 기도하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데반 자신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주님이 하신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 하루, 아니 앞으로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다급할 때 우리는 예수님도 이용하고 기도도 이용하고, 나의 방법도 이용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안 되지요.


그러니 우리는 죄인으로 남아 있고,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게 하시고, 예수님만을 믿게 하시며 의지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셔서 진정으로  행복한 자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을 믿는 자가 참으로 복된 자 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복 가운데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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