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창세기33:1-17

푸른 섬 2007. 7. 16. 12:39
 

은혜받은 자

창세기33:1-17

해는 돋았고 환도뼈로 인해 야곱을 절둑절둑 절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 드디어 그가 두려워 하든 에서와 사백인이 들어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곱은 여종과 그 자식들을 맨 앞에, 그리고 레아와 그 자식들을 두 번째,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두었습니다.

야곱이 평소 누구를 사랑했는지, 누구에게 더 많은 사랑을 부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전히 야곱은 형이 자신을 어떻게 할런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 라헬과 그리고 그 아들 요셉을 맨 뒤에 세웁니다.

살려 줄지 죽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들 앞에 나가서 형에게로 가까이 가면서 일곱 번이나 절을 합니다.

그러자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 났습니다.


에서가 달려 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울었습니다.

희한한 일이 일어 났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전략이 성공한 것입니까?

표면적으로 보면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보면, 그가 세 떼를 앞서 보낸 후 하나님과 만난 후의 그의 마음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져 있습니다.

그 전에는 살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살기 위한 할 수 없는 굴복이지만, 이제는 야곱이 진정으로 형께 은혜를 구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지요.

무슨 잘못말입니까?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축복도 뺏은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서 형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과 같이 형님도 그렇게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야곱을 너무너무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는 모습은 어디에 갔는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400인을 거느리고 온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예물을 드립니다. 자신을 용서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겠지요.

이제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어찌보면 너무 싱겁게 끝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답답하고 불안했던 것이 어찌 되었는데 너무나 쉽게 해결 된 것입니다.


그 이유를 우리들은 야곱이 이스라엘 됨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가 아닙니까?


야곱이 이스라엘 됨으로 에서를 이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이김이라는 것이 결코 힘의 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죽음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야 말로 곧 이기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려면 환도뼈를 치지 않고 곱게 말로만 하시지 왜 평생 그가 지팡이를 의지하여 살도록 만드시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야곱의 죄 때문입니다.

야곱을 죽이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야곱의 환도뼈를 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스가랴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이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된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 말씀과 일치되는 말씀입니다.


이 땅의 인간은 누구나가 이렇게 야곱처럼 폴짝폴짝 자신의 살아 있음을 내세웁니다.

이런 죄악을 갖고는 결코 하나님의 언약은 이룰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단순히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후 자신을 낮추니까 사납던 형 에서와 이렇게 쉽게 화해 되었다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성취해 가시는가를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자신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야곱의 수단과 방법이 아니라 자신을 부인하는 모습으로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이런 반론을 재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어찌되었든지 야곱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써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대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 제가 한번 질문 해 보겠습니다.

야곱이 만일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을 여전히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방법을 부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심을 알려 주십니다.

부정하시는 근거로는 바로 야곱이 이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형에게 대하는 야곱의 태도를 보십니요.

이것은 그냥 가식적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형 에서가 야곱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십시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기적이죠.


형 에서는 야곱을 죽이기 위해 왔지만, 자신을 낮추는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살려두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형과의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 되었습니다.


그런데 형이 어떤 제안을 합니다.

자신이 야곱의 길잡이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하는 말이 아니라 야곱을 충실히 도와주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야곱은 형 에서에게 먼저 가라고 하면서 자신은 나중에 세일로 가겠다고 합니다.

물론 그의 핑계가13절에 나옵니다.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그러나 야곱은 세일로 가지 않고 숙곳에 머물러 버립니다.

물론 그가 숙곳에 머물게 된 배경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야곱과 합류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속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민족에 네 복중에서 나누이리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이유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추론할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있습니다.


그가 처자들을 데리고 삼촌 라반에게서 출발할 때 무슨 말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꿈에 말씀하셨는데 자신의 출생지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출생지로 가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가 서원했던 벧엘로 가지도 않습니다.


그냥 숙곳에 머물러 버립니다. 숙곳의 뜻은 우리, 장막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레아와 라헬을 설득할 때 했던 말이 사실일까요?
하나님께서 출생지로 돌아가라는 말씀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꿈에 말씀하셨는데 야곱이 지금 자신의 편리를 찾아 숙곳에 머문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서원도 지키지 않기 때문이지요.


성도란 그렇습니다.

자신이 분명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성도속에는 자신의 생각과 사고방식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사용하시어 반드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루어내고야 마십니다.


우리가 그렇지요.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구제불능인 인간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이 구제 불능인 인간을 통해서 말씀을 이루어 내십니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 자신을 낮추는 것,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등등.

모든 것을 죄인을 통해 이루어내시어 성도 속에서 반드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케 하십니다 .


여러분 이것을 믿으십니까?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나와 원수인 사람과도 이렇게 화해가 될까요?

여러분 자신을 부인하며,  화해가 되든지 여러분 자신이 핍박을 받든지 둘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후 야곱은 자신의 죄를 발산하면서 여전히 자신을 계속해서 부인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남과 겨루어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며 살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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