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창세기36장1-43

푸른 섬 2007. 7. 16. 12:41
 

에서의 번성

창세기36장1-43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에서의 계보를 이렇게 기록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에서는 창세기25장에 의하면 태어나기도 전에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창세기27장으로 가면 야곱은 축복을 받지만, 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저주를 받는 신세가 됩니다.


창세기27장39-40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세일 땅이 아주 척박한 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일 땅이 아주 척박한 땅이었다면 과연 에서가 그곳에 가서 살았겠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삭이 죽은 후 야곱과 헤어져 세일 땅으로 갑니다.


물론 오늘날 보기에는 척박한 땅이지만, 신명기 2장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곳을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으며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일 산을 에서 자손에게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볼 때 결코 척박한 땅의 의미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나안의 많은 지역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삭이 내린 저주는 어떤 의미입니까?

종국적으로 네 아우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사울왕 때에 유다에게  패배를  당하고(삼상 14:47), 다윗왕 시대에 유다에 복속당했습니다(삼하 8:13-14). 그런데 솔로몬왕 때에  반역하려고 시도합니다(왕상 11:14). 그러나 계속 유다에 복속 당했다가 요람왕 때에 반역합니다. 그러나 아마샤왕 때(왕하14:7)에 유다에게 다시 정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돔은 아하스왕 때에 완전히 유다의 지배를 버리고 이탈합니다(대하 28:16-17). 그러나 후에 다시 요한  하이카너스(Hyrcanus)로 말미암아 정복되었다고 합니다(Jos. Ant. XIII 9:1 XV 7:9).


말라기1장2절 끝부분과 3절을 보게 되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처음에는 황무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땅을 황무케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셨을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이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돔을 이렇게 황무케 하셨지만 에돔은 뭐라고 말하는고 하면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허실 것을 말씀하시고, 그 지경은 악한 지경이라 불리워지고,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볼 때 에서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는 백성의 대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여호와께서 얼마나 언약에 신실하신지를 보여주는 저주받는 도구로서 에돔이 심판받는 자의 대표적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들의 저주받음으로 인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도 크시다라는 찬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은 둘로 갈라집니다.

한쪽은 저주받는 자로써 다른 한 쪽은 축복받는 자로 갈라집니다.

저주와 축복은 결코 인간의 행위와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이 축복받고 싶다고 해서 축복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 받기 싫다고 해서 저주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에서와 야곱같이 저주받을 자는 저주받게 되어 있고, 축복받을 자는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에서의 후손을 왜 그렇게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을까요?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이렇게 번성하게 하시고, 잘 먹고 잘살게 하시는가로 이해하면 됩니다.


에서 자손들을 보게 되면 처음에는 하나님과 관련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4절에 나오는 엘리바스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힘이라는 의미고, 르우엘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민수기20장18절에 이스라엘이 세일길을 통과하게 해 달라고 했을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에돔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통과하지 못하리라 내가 나가서 칼로 너를 맞을까 염려하라”

철저하게 이스라엘과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역시 칼을 의지하는 인생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에돔이 강한 힘으로 이스라엘을 통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왕들이 등장합니다.

이 왕들이 한 일은 바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36장31절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는 왕이 이러하니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보다 훨씬 앞서 세상적으로 강력한 힘을 소유한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뒤틀어진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언약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지요.

앞서 본 말라기 1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결국 이들은 영영한 저주의 모델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세일 땅을 에서에게 주시고 이들을 이렇게 번성케 하시는가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갖는 의문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더라도 가인과 그 후손인 라멕의 업적이 나옵니다.

강력한 힘을 소유하고, 찬란한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께서 왜 저주받은 저들에게 이렇게 놀라울 정도의 힘과 찬란한 문화를 허락해 주십니까?

그것은 바로 이들이 영영히 저주받은 자의 표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73편을 한번 보겠습니다.

1절부터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셨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을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17절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졸지에 황폐케 되도 놀람으로 전멸한다는 말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악인들이 번성해야 하는가? 왜 이렇게 에서의 자손들이 번성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바로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버려두셨기 때문에, 파멸에 던지셨기 때문에 이들의 삶은 너무나 세상적으로 잘 풀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삽은 자신을 우매 무지하여 주의 앞에 짐승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짐승 같은 생각을 하고 살아 갑니다. 왜 가인같은 사람들은 잘 사는가? 왜 우리는 항상 이런 모습으로 사는가?


여러분 에서의 후손들이 이스라엘보다 먼저 왕정국가가 된 이유, 이렇게 잘 나가는 이유를 우리들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복은 시편73편28절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복이란 예수님과 늘 함께 하는 것이 복입니다. 이 복을 받았기 때문에 성도는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미움당하고 핍박당하며,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부자되고 건강한 것이 복이 아님을 분명히 아는 자들이 참된 복을 받은 자입니다.


에서가 잘나간다고 해서 부러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에서가 돈 많이 번다고 해서 부러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에서가 강력한 힘을 갖고, 많은 재물을 갖는다고 해도 부러워 하지 마십시오.


이들은 영영한 진노를 당할 자들의 대표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흑암의 나라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며 즐거워 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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