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창세기37:1-17

푸른 섬 2007. 7. 16. 12:42
 

창세기37:1-17

약속의 땅에 머문 가정에서 무언가 안정적인 시절이 찾아 오는가 했는데, 집안 속으로 들어가 보니,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라고 기록한 이유는 자식들의 생애도 야곱의 생애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이야기를 꺼집어 내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주 단편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야곱이 빌하와 실바의 자녀들과 함께 거하게 했습니다.

단, 납달리, 갓, 아셀이지요.

왜 요셉을 이들과 함께 거하게 했는지는 명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레아가 살아 있으니 아마 첩들의 아들들과 함께 있는 것이 요셉에게 유리했던 모양입니다.

3절에 보면 야곱이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 볼 때 요셉을 위한 특별 배려라고 보여 집니다.


그런데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첩자인양 형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는 자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자질쟁이라고 보여 지지요.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는 말을 읽게 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노아의 아들 중 함이 생각나지요.

창세기9장22절입니다.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함을 이 일로 인해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요셉을 어떨까요?

요셉은 오히려 야곱의 사랑을 덤뿍 받습니다.

희한하지요.


누구는 허물을 들추어 냈다고 해서 저주를 받고, 누구는 과실을 고하더라도 사랑을 더욱 받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요셉에게 일어날 일과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스라엘은 요셉을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여러 아들들보다 더 깊이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채색옷도 때만 되면 해 입혔습니다.

이 말은 다른 아들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자신도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를 받았고, 자신의 형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편애를 받아 자랐습니다.

이것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입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믿기 보다 나타난 현상을 믿습니다. 제가 그런 것은 없다고 해서 그런 것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설사 그런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말씀을 믿자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이런 어떠한 문제도 문제시 될 것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거룩케 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렇게 하신 것이지요.


그러니 제말 우리 몸, 육체에 일어나는 일을 두고 그것이 어떠니 저떠니 하시지 말고, 말씀을 붙들고 믿고 살자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주님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천년만년 일어나더라도 감사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인해 제가 아주 고약한 유전병에 걸려 죽는다 할지라도 감사합니다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죽는 두려움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는데, 우리는 자꾸 죽는 것을 두려워 하지요.


라헬을 사랑하는 그 마음, 그리고 91세에 낳은 늦둥이 이므로 사랑스럽지 않겠습니까?

정말 우리 말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요셉일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편애로 인해, 그리고 요셉의 평소 행실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고, 요셉에게 언사가 불평했습니다. 평안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술 더 떠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요셉이 꿈을 꿉니다. 어떤 꿈을 꿉니까?

7절입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꿈을 꾸었으면 입 다물고 있지 그걸 또 자랑하네요.

평소 요셉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아버지 이스라엘을 등에 업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형들이 뭐라고 합니까?

8절입니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

꿈 해석이 간단하지요.

형들은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요셉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무얼 해도 미움 받을 짓만 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다시 꿈을 꿉니다. 그리고 또 형들에게 말을 합니다.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그리고 아버지께도 말합니다.


그러자 아버지 이스라엘이 요셉을 꾸짖습니다. 10절 하반절입니다.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이 일로 인해 형들은 이제 시기하게 됩니다. 왜 시기하는가 생각해 보면, 그런 꿈을 자신들을 꾸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꿈을 꾸고 싶다고 해서 꿈이 꿔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밉고 질투 나고, 그러니 확 그냥 죽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요셉의 이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과거 경험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왜 요셉을 꾸짖었을까요?

자신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차원에서일 것입니다.

자만하지 말라는 차원이겠지요.


그리고 자신과 에서와 오랜 세월동안 원수관계로 있었듯이 이들 형제들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요셉의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세겜 땅으로 형들의 안부와 양떼의 안부를 묻기 위해 세겜으로 가고, 도단으로 가서 형들을 만나는 장면으로 오늘 본문이 끝납니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꿈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혹시 내가 꾼 꿈이 요셉과 같은 꿈이 아닐까?


물론 요셉도 오늘날 우리들이 꾸는 꿈의 종류를 꾸었다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꿈을 꾸게 하시는 분은 따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아니면 요셉의 꿈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서로 가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다니엘이 그 내용도 말하고 해석도 말하는 것을 볼 때에는 이 꿈이 그냥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꾸는 일상의 꿈은 개꿈이며,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의 꿈은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해야 합니다.


실재로 성경의 모든 꿈들이 십자가를 증거하는 내용물을 담고 있고, 꿈이 아니더라도 모든 내용들이 하나님의 계시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미 계시가 완성된 이상, 성경이 완성된 이상 더 이상의 계시로 꿈은 없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이 꿈을 꾸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 운운하는데, 그거야 요즘 서점에 나가면 꿈 해석에 관련해 많은 책들이 나와 있습니다.

많은 경우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지요.


꿈 해몽은 다니엘 시대에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꾼 꿈은 결코 알아 맞힐 수가 없지요.

인간의 제한성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의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하면서 많이 들은 말이 어제 꿈을 꾸었는데 오늘 조심해라는 말입니다.

아니면 기도하는데 뭔가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문제가 잘 풀릴 것이다, 아니면 조심해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제가 집에서만 들은 것이 아니고 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아주 흔하게 듣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그런 것이 다 자신의 생각이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부분도 있었지만 맞는 부분이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맞추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다니엘서를 보면 그들은 꿈만 이야기만 하면 정확히 해석해 날 자신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거의 정확히 꿈을 해석하지요. 믿지 않는 사람도 말입니다.

역술인이 사주팔자를 보는데, 소위 점을 보는데, 그게 맞을까요 맞지 않을까요? 많은 경우가 맞습니다. 왜냐하면 수 천년간 내려온 자료들의 종합인데, 그것이 아주 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대충 때려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이런 자들을 죽이라고 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사람의 말을 듣고 순종하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성도에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완성된 말씀, 계시가 있습니다.

그러니 꿈이 어쩌고 저쩌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봤다니 뭐니 하면 그는 계시를 벗어나 버립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마귀의 조종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크시기 때문에 성경말씀 밖에서도 일하실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주는 사고 방식이며, 이 하나님은 우상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밖의 하나님은 이미 자신이 만들어낸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우상의 특징은 자신을 위한, 자신을 살리기 위한 우상하나님입니다. 아무리 예수님 운운해도 성경말씀을 벗어나버리면 이미 사단이 행하는 행사가 되는 것입니다. 역술인들이나 무당들이 하는 짓과 이들이 행하는 짓의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이름만 예수님을 차용할 뿐입니다. 성경계시를 벗어난 것은 모두가 다 마귀적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꿈을 꾸거나 이상한 것이 보인다고 하면 별거 아니구나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것을 끼워 맞추기 시작하면 마귀가 계속해서 활동하여 그 사람 마음을 사로 잡도록 계속해서 그러한 꿈을 꾸거나 이상한 것을 보이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니요.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드리면 성경말씀이 기억되어 떠 오른 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 하지 마십시오. 마치 자신이 직통계시를 받는 듯한 언사를 하는 것은 주님을 믿는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을 신화화 시키는 수법입니다.


사실 오늘 중요한 것은 이렇게 죗덩어리인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꿈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주가 되는 꿈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과실을 덮어주지 못하는 자, 자기를 자랑하는 자, 교만한 자가 주가 된다, 이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꿈을 주신 그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죽음의 자리로 내 몰리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이 무엇입니까?


요셉처럼 과실을 덮어주지 못하는 꿈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주처럼 되는 꿈입니까?

에서의 세상에서 보여지는 왕, 힘 있는 다스리는 왕이 되는 꿈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증인으로 세우기 위해 저를 어떤 상황 어떤 형편에 처해도 좋습니다라는 순종의 꿈입니까?

우리 모두 날마다  주님만 증거 되어 진다면 어떤 상황, 형편에 놓아도 감사 하겠습니다라는 순종의 꿈을 꾸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40장5-23  (0) 2007.07.16
창세기39장20-40장4  (0) 2007.07.16
창세기36장1-43  (0) 2007.07.16
창세기35장1-7  (0) 2007.07.16
창세기33:1-17  (0) 2007.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