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 13

푸른 섬 2008. 1. 22. 00:09
 


재앙을 벗어난 자

사무엘상6장1-16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하는 일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수 많은 일들을 만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블레셋 사람들과 같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경험 말입니다.


갑자기 아프다든지 아니면 갑자기 누가 죽는다든지, 아니면 사업이 망한다든지 각양 각색의 일들을 만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보나 마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블레셋 사람처럼 행동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 나에게 이런 일을 주셨는데 과연 이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 암았는지 아니면 그냥 우연히 된 것인지 한번 따져 보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이런 계산을 깔고 행동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품고 행동을 옮기게 됩니다.


간증이라는 것을 들어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풀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더욱더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품어 십일조도 빠지지 않게 내고 기도도 열심히 했다.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의 형편을 돌보아 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즉 아직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자신도 자신의 삶 속에서 부지런을 내어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결과를 얻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이런 사고방식이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블레셋 사람이나 무엇이 다릅니까?


과연 같은지 다른지 한번 살펴 봅시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지방에 있은지 일곱달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는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의논합니다.

자신들의 제사장과 복술자들을 불러 해결책을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저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지요.

그렇게 재앙을 당해도 이들은 여전히 아직까지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재앙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번 시험을 해 보겠다는 것이지요.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는 말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어서가 아닙니다.

그당시 일상적인 종교적 행위입니다.


자신들의 신 보다 하나님의 신이 좀 세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한번 해 보고 이 재앙이 과연 이스라엘 신으로 말미암아 온 것인지 확인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준비합니다.

자신들에게 내린 재앙을 대표하는 모양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속건제물 즉 잘못에 대한 댓가를 치러주는 모양새를 갖춥니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출애굽 이야기를 꺼집어 냅니다.

출애굽할 때 금 은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출애굽한 사건을 기억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찌되었든지 그냥은 언약궤를 돌려 보낼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두가지를 확실히 할 수있습니다.

하나는 이 재앙이 정말 이스라엘의 신으로부터 왔는지 확인할수 있고 또 하나는 만일 그렇다면 신을 달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 지금 재앙으로부터 벗어나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길로 돌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8,9).


철저하게 계획을 짭니다.

젓 나는 두 마리의 소를 준비하지요. 그런데 이 두 마리의 소의 송아지는 집에 돌려 보냅니다.

그러면 어미 소들이 당연히 자신들의 새끼로 인하여 제대로 수레를 끌수 없을 것이라고 저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재앙이 과연 정말 이스라엘 신으로부터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를 확실히 확인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건제로 번역된 말 자체가 율법에 나오는 그런 속건제 의미가 아닌지를 우리들이 금방 눈치 챌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를 여호와의 언약궤에 적용해 보는 것입니다.

또한 주어 들었든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신을 달래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 집니까?

암소가 울지도 않고 곧장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정말 이 일이 이스라엘 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확인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절대로 여호와께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무엇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하는 사람과 닮았습니까?


바로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을 시험하는 식으로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계신지 한번 따져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닥칠때 한번 붙어 보는 것입니까?

진짜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계신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물론 대다수가 좋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포기하는 것들도 있고, 또한 그정도의 오기로 밀어 붙이는데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들이 좋은 결과를 맞았을때 뭐라고 합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더라고 합니다.


무엇을 근거로 말입니까?

자신이 잘 된 것을 근거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블레셋 사람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생활을 할 뿐입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신하고, 온갖 희생을 하지요.

그러면서 그 결과를 두고 하나님이 진짜 계시는 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 짜 성도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빌립보서 4장11-14절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그러니 십자가의 영을 받은 자들의 사고방식과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사고방식이 정말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의 관심은 항상 자신의 몸에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우상 숭배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은 오늘날 교회 안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관심은 어떻게 예수님이 전파되고 증거되느냐에 있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아프면 아픈대로 주님이 증거되고 있음을 믿는자가 참으로 재앙을 벗어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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