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14

푸른 섬 2008. 2. 26. 19:05
 

바알과 아스다롯

사무엘 상7:3-4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긴 인생이 아니라 짧은 인생을 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인생이 결코 길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호흡이라는 것이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니 이 땅에 사는 인생은 정말 구더기 같은 인생이기에 이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짧은 인생이냐?

얼마나 긴 인생인데.


우리가 읽는 어린아이들 동화처럼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무슨 말인고 하면 결론이 확 빨리 나오잖아요.

책이 결코 두껍지도 않고.


그래서 우리의 기억 속엔 항상 결론이 기억됩니다. 왕자와 행복하게 살았더라. 아니면 공주와 행복하게 살았더라. 아니면 아빠와 행복하게 살았더라.

아니면 다시 집으로 돌아 왔더라. 등등.


이런 결론은 우리의 뇌리 속에 박혀 굉장히 오래 가고 잘 지워지지 않죠.


그러며 성경말씀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시어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하시고 믿는 자들은 구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주님 되신 예수님과 왕노릇한다는 내용입니다.


동화책의 결론이랑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중간과정도 보면 비슷합니다. 주인공이 어려움을 당하고 나서야 결국 행복해 진다는 결론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야 우리가 사는 주변, 즉 성경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고, 들려지는 이야기들 아닙니까?


지나고 나면 다 지난 과거가 아름다워보이고 추억으로 남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동화책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동화책의 주인공은 항상 어려움 당하는 주인공 사람 자신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주인공은 어려움 당하는 사람 자신이 아니라 그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품고 가시는 주님 되신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개인의 행복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화책은 좋아 하지만 성경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동화책은 철저하게 인간 중심, 그 책을 읽은 자기중심이지만 성경은 철저하게 자신을 오히려 부인해야 하고 자신이 죽음으로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오히려 그 삶 자체가 복이요 행복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 왔는데 아직도 여전히 블레셋이라는 이스라엘이 진멸해야 되는 대상이 펄펄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살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아 우상까지 섬기는 지경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요구에 이들은 다시 이방신들을 제하고 오직 여호와만 섬깁니다.


우리는 이런 것이 싫은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주셨으면 원수들을 다 제거해 주시는 것이 당연한 처사가 아닙니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해 주셨으면 이제 더 이상 딴 생각 않고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도록 다른 주변을 정리해 주시면 안됩니까라고 묻고 싶습니다.


직장에 나가도 성경말씀 열심히 볼 수 있는 환경과 시험에 들지 않는 상황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업을 해도 불의를 하지 않고 돈을 잘 벌수 있도록 , 그리고 그 돈으로 남을 잘 섬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아주 종교적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우리들 바램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적 삶은 어떻습니까?

꼬이고 꼬이고 또 꼬이는 삶이 아닙니까?


눈만 뜨면 부딪혀야 하고 밥만 먹으면 처절한 생존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꿈을 꿉니다.

빨리 결론이 나야 할 텐데.

왜 이리 인생이 길지.


쫌 짧게 확 끝내 버리시지.

제가 서론에서 동화책을 언급한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 긴 인생으로 다가 옵니다.

그러니 동화책이야 말로 우리의 바램을 가장 잘 대변해 주죠.


그러나 성경책은 이런 우리의 소망을 여지없이 허무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히려 약속을 받고도 여전히 약속받은 자로서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야합니다.


때로는 괴로움도 당해야 하고 때로는 그들에게 속아야 하는 현실 속에, 때로는 그들과 동화되어야 하는 현실 속에 살아간다는 사실이 우리들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힘든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본문을 이스라엘을 확 욕해 버리고 성경을 팍 덮어 버리고 싶습니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고 하면 이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런 것을 꿈꾸면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을 꿈꾸었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우리가 기대하는, 우리가 꿈꾸는 식으로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 옆에 달리니 강도처럼 죽을 때 까지 자신의 욕심대로 살다가 죽는 순간 예수님을 믿어 구원 얻는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강도는 자신의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예수님을 어떤 분이신가를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왜 지옥가야 하는가를 분명히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계시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을 섬겼으면 확 심판해 버리시지 왜 살려 두십니까?


왜 자꾸 불쌍히 여기십니까? 은혜를 내려 주십니까?

이것이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지를 증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지를 증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약속의 땅에 넣어주시고, 아직도 그 원수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남겨두신 이유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남겨두실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하셨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가 없다는 것을 털 것 하나 남기지 않고 여지 없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들이 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본모습을 보여주는 인생,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인생으로 살려는 것이 아니라 자꾸 괜찮은 인생, 나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괜찮은 인생이 되어서를 보여주는 인생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젊을 때는 복음복음, 예수님 예수님 하다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간적이 되어 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적이란 피리리인데.

피리리가 무엇일까요?


십자가처럼 비상식적인 것, 십자가처럼 인간을 무시하는 복음은 제거하고, 인간사회 공영에 이바지 하는 행동들입니다.

그래서 처음에서 복음 이야기하면 좋아 하다가 세월이 지나면 복음이야기는 조금하고 얼마나 인간적인가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이런 사실을 미리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은 긍휼의 그릇으로 어떤 사람은 진노의 그릇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야 결국 진노의 그릇 노릇밖에 못하도록 긴 세월을 살게 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긍휼의 그릇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긴 세월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좀 긴 인생을 산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순간순간 감사하지요.


동화처럼 곧장 결론이 나지 않아도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인생이 있다는 자체가 복이고, 은혜이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를 모르는 인간들은 무엇을 내세웁니까?

자신의 행위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여러분은 긴 인생 중에서 내세울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만 내세우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살면서 십자가의 은혜가 소록소록 피어 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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