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요구하다
사무엘상8:4-9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후 그 중심이 성막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펴보는 사무엘상에 의하면 현재 언약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사람은 제사장들입니다.
특히 사무엘 상을 읽어나가게 되면 제사장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엘리가문이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습니다.
사무엘상2장27-3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을 삼아 그로 내 단에 올라 분향하여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의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 지라”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민수기8장19절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선물로 주어서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때에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이스라엘은 이렇게 제사장 중심으로 죄를 용서 받은 증거가 날마다 보여 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왕을 요구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지금 왕이신 하나님에 의해 죄용서함을 받아 여기까지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무엘의 아들들로 인해 크게 실망하게 되니까 왕을 요구합니다.
왕을 요구하면서 말하는 수식어를 보세요.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달라는 것입니다.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이들에 왜 이렇게 열방과 같은 왕을 세워 자신들을 다스리게 해달라고 합니까?
아마 주변 열방들이 왕을 중심으로 제대로된 나라를 만들고 있고, 그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형편은 제대로된 사사가 등장하면 힘이 결집되고, 나라가 별 문제가 없는데, 사사가 사라지면, 사사가 변변치 못하면 나라 꼴이 엉망이 됩니다.
그러니 왕이라는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의 나라꼴이 아니라 뭐가 그럴듯한 나라꼴을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이 말이 우리들이 이해하기가 쉬울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죠. 신앙생활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떻습니까?
일사분란, 무언가 자리잡힌 신앙생활 같습니까?
그런것 같지 않잖아요.
그런데 만일 우리 중에 누가 강력한 중심을 형성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처럼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우리들 모두가 인정한 사람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하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물론 어렵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훨씬 실감나고 사실적일 것입니다.
예배에 빠지지 마십시오.
십일조 하십시오. 감사헌금하십시오. 등등.
명령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신앙생활하는 것 같습니까?
그런데 늘상 성령을 쫓아 살아야 된다. 주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는 인생이 참으로 복된 성도라라고 하면 이것은 감이 안잡히는 것입니다.
이게 왜 그런고 하면 인간의 본성이 이런것과 상충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을 쫓는 것도 자기 임의로, 마음 가는대로 하면 별 문제가 없는데, 늘상 말씀히 떡 버티고 있으니 이만 저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누군가가 우리의 왕으로 계시다면 신앙생활하는데 지금보다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목사를 왕의 자리에 올려놓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사사기를 한번 보세요.
왕이 없어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다고 합니다.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면 참으로 편리하고 좋을 것 같죠.
그런데 인간 본성상 이게 결코 편리하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고 하면 힘이 없습니다.
개별적으로는 무언가 힘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속한 나라는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이 왕 행세를 하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 오고 싶으면 오고, 말고 싶으면 말고, 헌금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고, 모이라고 하면 안 모이고, 완전히 자기 멋대로입니다.
성경공부도 그렇죠.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러면 우리 본성상 어떻게 됩니까?
열심히 모일까요?
헌금 할까요?
절대 안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만 행할 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이 편한대로 할 뿐입니다. 육신이 어떤 것이 편한가. 무엇이 수월한가 판단하여서 행합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엉망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게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열방과 같이 왕을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제가 말도 안되는 예를 들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게 되면 왕이 따로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살아계신 주님되신 예수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조직의 우두머리나 조직을 왕으로 세워 놓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감히 목사의 말을 거스리지 못합니다.
그것도 아무 목사가 아니고,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열방과 같이 왕을 세워 자신들을 다스리게 해 달라는 것이 과거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똑같이 있습니다.
주님이 왕이 되셔서 지금 친히 우리를 다스리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왕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뭔가 제대로된 모습을 갖추어 보지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이들이 하나님을 안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버려 자신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벌써부터 이들의 왕으로 이들을 인도해 오고 계셨는데 이들은 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세요.
8절입니다.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하나님의 평가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할때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면 너무 독선적이고, 한 부분만 보아서 그렇게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끔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습니까?
언제 우상만 계속 섬겼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현실입니다.
왕을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우상을 섬기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요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후에 하나님께서 왕을 주시지만 왕을 주신 배경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왕을 주신 이유를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속에서는 늘상 왕을 요구합니다.
열방과 같은 왕이 우리에게 있어 우리를 다스리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놀랍게도 지금도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 아예 이런 것을 부정해 버리고 눈에 보이는 왕을 만들거나, 찾아 나서고, 그 왕의 말을 들으며 왕을 따라 다닙니다.
그러나 믿음 있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왕의 지시를 받으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런 자는 늘상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누구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내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하는 자였고, 항상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 그런 자 였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생을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지금도 십자가 은혜 속으로 이끄심을 믿으며 사는 인생입니다. 이런 두 가지 모습을 가진 자가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