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개시는 하나님
사무엘상15장32-33
지난 주 설교에서도 언급했지만 진멸이라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거부감을 갖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인간을 만든 신이라면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사람들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인정치 않습니다.
신약의 예수님만 참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신약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예수님도 인정하지 않을텐데.
어떤 사람이 인간의 뇌에 대해서 글을 썼는데 아주 재미 있습니다. 사람의 뇌라는 것은 사실과 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확신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사물을 본다고 합니다.
흔히들 되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이며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 하기위해 변명을 하기도 하고 자신이 내린 결정에 후회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속이기도 한답니다. 보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보고 싶은 대로 들으며 착각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쇼핑을 하다 너무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습니다.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자신의 월급에 비해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의 옷을 사 버렸다면 뇌는 어떻게 할까요?
환불할 게 아닌 이상, 뇌는 산 옷이 마음에 드는 이유를 계속해서 �습니다.
후회하기 싫어하는 본능 때문에 뇌는 변명거리를 찾아서라도 선택을 합리화하려고 한답니다.
특히 사업상의 중대한 선택을 했을 때 우리의 뇌는 나름대로 그럴싸한 이유를 찾아내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고 싶어한답니다.
책의 내용이 너무 재미있겠죠?
이케가야 유지라는 사람이 지은 ‘착각하는 뇌’라는 책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사람은 성경을 보든지, 무엇을 하든지 결정적으로 나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옳다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아말렉을 칠때 진멸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명하셨지만 자신의 판단에는 진멸한다는 것은 너무 아깝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판단에 따라 행동에 옮겼습니다.
좋은 양과 소는 살려 둡니다.
누구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물론 이 말도 거짓으로 보입니다만. 이런 말 조차도 자기 스스로 조작해 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정말 사람들이 거부하고 싶은 내용이 나옵니다.
사무이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어떻게 죽입니까?
찍어 쪼갭니다.
보통 전쟁같으면 그래 찍어 쪼개든 불에 태우든 그럴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명을 내리실 수 있는가입니다.
하나님 이야기는 너무 나갔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이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날 사무엘 같은 목사가 있다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터넷이 이렇게 발달한 시대에 동시에 전 세계가 이 장면을 현장 생중계로 본다면 하나님은 이 땅에서 설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폭력적인 것에 대해서는 일부는 빼고 누구나가 다 거부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가면서 이런 내용을 보면 성경의 내용에서 빼버리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내용에 대해서는 눈 지긋이 감고 거부해 버립니다.
앞서 제가 언급한 책 이야기랑 똑같죠.
성경책을 읽어가면서도 자신이 보고자하는 것만 보고, 자신이 옳다고 하는 것만 선택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폭력적인 선지자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3-1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으니라”
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합니까?
이유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듣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지 않아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깨달음, 앎을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듣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자들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어떻게 성경을 해석할까요?
예수님을 보아도 예수님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요한복음11장47-50절을 봅시다.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나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한 사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야 말로 자신들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에 대해 내린 결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유는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의 생각을 어떻게 이용하십니까?
51,52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니러라”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생각을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사용하십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인간을 사용하십니다.
요한복음5장 29절에 보면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한 일을 행한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런 말씀이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심판이라는 것을 제거해 버리려고 합니다.
왜 심판이라는 것을 제거하려고 합니까?
행복한 자신들 만의 세상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있다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살수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제거할 것은 제거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 들일 뿐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사랑할까요?
그들의 이야기를 죽 들어보면 십자가도 있고 고난도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속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행복입니다.
십자가도, 고난도, 하나님의 어떤 말씀도, 심판도 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처럼 결단을 내립니다.
좋은 것은 예수님을 위해 남겨 두어야지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 속은 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행동입니다.
사무엘이 아각을 찔려 쪼개어 죽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있는데 너무 과격한 표인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말이 성경에 나오고 더더욱 하나님의 뜻으로 표현된다는 것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들을 제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아이들을 고상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성경의 내용도 좀 바꾸어 가면서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한가지 생각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모든 선택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교회에 다니다가 다시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는 교회로 갑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물론 선지자적 삶을 살기 위해 들어가는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얼마못가 쫓겨 나죠.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처음 들을 때는 이야 이것이 생명이구나, 정말 성경대로 말씀을 보는구나라고 하죠. 그러나 이것도 얼만 못갑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다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말씀을 따랐다가는 내 행복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교회를 선택하고 성경을 읽습니다.
기도 합니다. 전도합니다.
그러나 정말 말씀을 제대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사무엘이 아말렉왕을 칼로 찍어 쪼개듯이 말씀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 자신을 칼로 찍어 쪼개어 버립니다.
이런 성도는 복된 성도입니다.
그러나 성도 아닌자는 성경을 백날 읽어도 칼로 찍어 쪼갠다는 이런 말씀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복에만 눈이 팔려 있기 때문이죠.
히브리서4장12,13절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찔려 쪼갭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제사장이신 예수님만 붙들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날마다 말씀에 쪼개어 지는 우리들이 되시고, 그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만 붙드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