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다니엘1:17-21
많은 성도라는 사람들이 오늘같은 본문을 읽게 되면 굉장히 흥분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비록 지금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와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열배나 더 나은 지혜와 총명이 있습니다.
바벨론의 박수나 술객은 이들과 비교가 안됩니다.
흔히 목사들이 이런 본문을 두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잘 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비록 어려운 환경이지만 일이 다니엘과 세 친구과 같이 술술 잘 풀려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라고 여깁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이런생각을 하실지 모릅니다.
아 목사님 그 정도는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놈들은 사기꾼들이지요.
맞습니다. 맞고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참된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런 본문과 같은 내용들을 보면 은근히 속에서 욕심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본문을 굳이 보지 않아도 이 땅에 사는 죄인들은 모두가 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와 함께 이런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도 은근히 이러한 일을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참된 십자가를 아는데, 믿는데 내 사업이 잘되고, 내 가정이 행복하고 등등. 은근히 이러한 마음이 여러분 속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구약을 보면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사실은 신약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구약이란 항상 그림자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구약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게 된다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게 됩니다.
우리 함께 마태복음5장13-16절을 봅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구절과 오늘 우리들이 읽은 다니엘을 연결해 보면 어떻게 됩니까?
성도란 다른 사람보다 탁월해야 한다. 그러나 그 탁월한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 재능을 썩히면 안된다. 이런 식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왜 이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엉뚱할 소리를 하느냐고요.
그것은 죄인들이 성경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고발하기 위해서 입니다.
성경을 들여다 보면서 그 은혜를 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그 탐심을 어떻게 해서든지 긍정받고 싶어하는 그런 죄악된 마음으로 성경을 들여다 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시는 빛과 소금이라는 것은 2절부터 읽어 보게 되면 결국 예수님을 믿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합니다. 핍박을 당합니다.
이것이 소금다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복음을 널리 증거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들이지요.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성령받은 자들이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곧 빛이라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빛이요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다는 말 속에 증인의 삶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태복음5:16절에서 말씀하시는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사도행전으로 가보면 아주 쉽게 알수 있습니다.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이 복음이 전해질때 회개하며 돌아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착한 행실이란 어떤 윤리적인 행동의 아름다움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빛과 소금이라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때에 어떤 믿는자가 똑똑하다. 훌륭하다, 윤리적으로 바르게 산다라는 것을 두고 빛과 소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두고 빛과 소금이라고 가르칩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목사들이, 성도들이 왜 이러한 것으로 쉽게 접근할까요?
그것은 십자가라는 것이 사람들이 볼 때에 어리석은 것이요, 부끄러운 것이요, 미련해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할 때 십자가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악세사리모양으로 십자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 김남준 목사라는 분이 목회하는 교회의 성도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마는 그 사람과 인터넷으로 논쟁을 했습니다.
제가 김남준목사의 한편의 글을 읽고 이렇게 평을 했습니다.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지 않는 글이라고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자기부인을 가장하여 자기를 더욱더 치장하는, 자신이 얼마나 쓸모있는 인간이냐. 가치있는 인간이냐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글을 썼는데 물론 우리의 탐심을 구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기도하자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글자 그래도 보면 사실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 글의 지향점이 인간에게 있더라는 것입니다. 제대로 기도하는 성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결국 그 사람과 일주일간 서로 주고 받으며 논쟁을 했는데, 마지막으로 온 답변이 무엇인고 하면, 저더러 하는 말이 당신은 그럼 당신이 하는 일이 없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면 우리는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김남준 목사가 목회하는 열린교회는 예배가 예배답고, 등등을 운운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가로 결론을 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십자가를 이야기 하지요. 그러나 그 십자가를 인간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증거해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세상의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주관되어집니다.
성도의 존재가 그러합니다. 성도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 그분의 성령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제가 왜 김남준 목사의 이야기를 했습니까?
그것은 결국 빛과 소금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곧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빛과 소금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말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를 두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이 얼마나 가치있고 쓸만한 존재인가를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되신 예수님은 단지 지짜 주되는 자신을 도와주는 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정말 빛과 소금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행위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피공로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 조차도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성도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를 완전히 부인하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함께 죽은 십자가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으로 불구하고 죄인들은 은혜도 필요하지만 우리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두고 왜 제가 이런식으로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경을 보면서 무엇인가 괜찮은 모양을 보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려는 그러한 마음이 자신이 온 땅의 주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립니다.
여러분 꿈도 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도는 은혜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그분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을 믿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행하는 자가 성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성도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힘입어 무엇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려 드리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니 공로를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돌리는 자가 있다면 이런 자는 성도라 부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