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스크랩] 강해12

푸른 섬 2009. 6. 10. 03:40
한 줄 되는 자는 살리고 두 줄 되는 자는 죽인다.
사무엘 하8장1-18
마태복음 25장1-13절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열 처녀 비유라고 하기도 합니다.

1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갔다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그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비유를 보게 되면 우리들이 꿈꾸는 천국과는 너무나 다른 천국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이 가득한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죠.
물론 맞기는 맞는 말인데 열처녀 비유에서는 이것이 무참히 깨어 지고 맙니다.

8,9절을 보세요.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리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우리들이 갖고 있는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어떤 생각입니까?
나를 희생해서라도 남을 살리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슬기 있는 여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슬기 있다는 여인들은 이기주의 자들입니다.
사랑을 행할 줄 모릅니다.

자신들의 기름을 미련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자신들이 기름을 사러 가는 것이 슬기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런 행동이야 말로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배운 사랑이 아닙니까?

그런데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슬기롭다는 행동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어떻습니까?
이들도 준비하긴 준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예측은 빗나갑니다.
신랑이 늦게 와 버린 것이지요.

자신들의 바램과는 전혀 상관없이 신랑이 왔다는 것입니다.

등불이 꺼져감으로 슬기로운 다섯처녀에게 자신들에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매정하게 거절해 버립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기름을 사러 갑니다.
이들이 신랑을 맞이하겠다는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신랑을 맞기 위해서는 기꺼이 기름을 사 와서 다시 기다리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신랑을 그 때 와 버린 것입니다.

이미 혼인잔치는 시작되었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이 혼인잔치에 참예하였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문을 두리리고 난리입니다.

주여라고 부릅니다. 자신들에게도 열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해버립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천국의 성격이 이런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 입장,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화가 나는 말씀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기름을 좀더 충분히 준비했다고 혼인 잔치에 참예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늦게 왔기 때문에 기름이 떨어 졌고, 그래서 기름을 좀더 준비하기 위해 기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와버린 것입니다.

신랑을 기다리지 않은 것도 아니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단지 좀 부족했을 뿐인데 그것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말씀 아닙니까?
이게 그냥 결혼식이라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마는 누가 천국가고 누가 지옥가느냐의 문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천국과 지옥의 기준이 너머 황당할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래 미리 미리 기름을 많이 준비하지.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많이 준비하지 않았을까요?
자신들 나름대로 충분히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신랑이 더디 온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랑이 더디 옴으로 모든 것이 갈라집니다.

이렇게 보면 신랑은 의도적으로 더디 왔고, 의도적으로 미련한 다섯 처녀가 없을 때 와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미련하다, 슬기롭다는 기준은 누구에 의해 나누어 집니까?

그것은 신랑입니다.
신랑이 자신이 혼인하기 싫은 자들이 떠날 때를 기다렸다가 와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자동적으로 남아 있는 자들이 슬기로운 자들이 됩니다.

물론 미련한 자들은 등만 가지고 여분의 기름은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슬기 있는 자들은 등도 가지고 여분의 기름도 가져 갔습니다.
문제는 여분의 기름이 있느냐 없느냐로 인해 신랑이 갈라내는 작업을 가능케 했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기준이 기름을 준비 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신랑이 신부로 맞이하느냐 맞이 하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완전 다윗의 세상입니다.
특히 2절을 봅시다.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회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진짜 희한한 짓을 다윗왕이 했습니다.

줄을 갖다 놓고 한줄 되는 사람은 살려주고 두 줄 되는 사람은 죽입니다.
이런 다윗의 행동을 볼때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미쳤어. 취향도 희한하네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이렇게 한 것은 모압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그럴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이고 살리는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오실 주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장에 보면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이름이 예수님이라는 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왜 그런고 성경 말씀은 항상 배경을 깔고 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 7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으니”

놀라운 말씀입니다.
방주를 지어 구원받은 자체로 세상을 정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구원하신 백성들의 행동하나하나가 세상에 대해서는 정죄하는 일로 규정됩니다.

그러니 자기 백성을 저희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구원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 백성만 구원하시지 자기 백성 아닌자는 철저하게 지옥보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갈라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편이 안되면 다 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편은 끝없이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기시고 그렇지 않는자들은 철저하게 예수님과 원수가 되게 해 버리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8장21-22절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이런 불효를 가르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만 있지 않겠죠?

얼마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은 것을 두고 서거니 자살이니 말이 많았죠.
그러자 한 편의 사람들이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니 뭐니 하면서 논쟁을 벌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들에게 제대로 알여 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전체가 다 들고 일어나 그런 불효를 가르치는 예수는 사라져라 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5월 8일이 어버이 날인데 이 주간 주일이 되면 효에 대해서 많이 설교를 하죠.
그런데 이런 본문을 갖고 설교를 해 보세요.

분위기가 살벌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왕이 마음대로 합니다.

한줄 되는 자는 살려두고 두줄 되는 자는 다 죽입니다.
이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행정13장48절을 봅시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다는 어떤 어려움과 고난 역경이 와도 다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되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편안하고 안락한 상황에서 복을을 듣게 되더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드러내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다윗은 장차오실 주님되신 예수님을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도 주님되신 예수님을 살아 계시어 이 일을 하십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다는 믿게 하시고 그렇지 않는자는 철저하게 배제해 나가시는 일 말입니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박수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이에 대해 기분 나빠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미련한 처녀입니다. 이런 자들은 늘상 자신의 행위를 앞장 세우는 자들입니다. 일방적인 주님의 결정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BLUE ISLAND
글쓴이 : 정석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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