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거절
사무엘하10장1-19
고린도 전서 2장 12-16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세상을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육에 속한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의 이해는 항상 사람의 지혜로 이해하려고 하고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의 일은 절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 무엇이길래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아 들일수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그분의 피로 죄용서함을 받아 구원을 얻을 수 있고 또한 그분의 뜻대로 지옥 보낼자는 지옥보낸다는 사실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지 않는 자들은 결단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육에 속한자로 남게 하여서 사람의 지혜로만 인생을 살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읽을 수록 성경 말씀을 알아갈수록 사람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당황케 합니다.
정이 있고, 눈물도 있고, 사랑도 있고 뭔가 인간적인 것으로 끈끈하게 연결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오히려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님되심을 더욱더 분명하게 전하는 도구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당장 저에게 이런 반문을 던질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렇게 열심히 복음전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그의 열심과 사랑, 교인들에게 대한 정들이 다 필요없는 것들이냐, 뿐만 아니라 그의 목숨을 던져서 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다 무엇이냐?
이런 것들이 다 필요없느냐라고 따질 것입니다.
우리가 듣는 것이 늘상 이런 이야기 아닙니까?
필요 없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 그럼 우린 뭐냐? 로봇이냐? 자유의지가 없느냐? 등등.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신이 받은 영대로 해석을 합니다.
육의 영을 받은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서 사람의 지혜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받아 들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하나님의 성령의 일은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일, 즉 십자가 복음은 자신의 지혜를 무시합니다.
자신의 삶을 부정해 버립니다.
삶이 필요 없다가 아니라 삶이 전적 죄인의 삶이다라고 말입니다.
늘상 죄를 지적해 대는 성령님이시니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이런 복음을 받아 들이겠습니까?
그러니 십자가의 복음을 안다고 해 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로 갑니까?
사람의 지혜가 왕노릇하는 것으로 갑니다.
그래야만 지혜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고, 그래야만 자신의 두각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해석은 명쾌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일은 전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전할 수가 없죠.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렇듯 인간을 비참하게 몰아가고 참혹하게 짓밟아 버립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일을 벌이시는데 인간이 가만 있겠습니까?
절대 가만있지 못합니다.
나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은 모릅니다.
자신이 세상의 영을 받아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친히 이런 일을 벌여 나가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단지 자신의 자신의 신앙생활을 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주님되신 예수님의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암몬자손에게 은총을 베풀려고 합니다.
마치 사울의 집에 속한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던 것 같이 말입니다.
과거 다윗이 어려움을 당했을때 나하스 왕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다윗은 그 은총을 값으려고 신복들을 암몬 자손의 땅에 보냅니다.
그런데 암몬왕 나하스의 아들 하눈이 어떻게 합니까?
다윗이 신복을 보낸 것은 염탐하기 위해서라는 신하들의 말을 듣고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그 수염을 깍고 그 의복의 중동 볼기까지 자르고 돌려 보냈습니다.
쉽게 말하면 엄청난 조롱거리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수치심을 주고 모욕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후 군사력을 강화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됩니까?
17-19절을 봅시다.
“혹이 다윗에게 고하매 저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승의 tfka과 마병사만을 죽이고 또 그 군대 장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하닷에셋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이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
군사력 강화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은총을 베풀어 주려고 해도 스스로 그것을 거절할 뿐 아니라 은총받을 자격 없는 자들은 이렇게 암몬 때문에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이렇게 은총을 입지 못할 자들은 은총을 베풀어 준다하여도 그것을 거절해 버립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4장1-4절을 봅시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놀랍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하니 사도들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믿은자가 많습니다.
그전에 어떤 자들이 나옵니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도 전함을 싫어하는 자들이 나오죠?
이렇듯 복음전파는 누구를 구원하겠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할 필요가 뭐있냐? 목숨 내 놓고 할 일이 뭐 있냐? 다 주님이 하시는데 하는 말은 나 지금 주님의 성령을 받지 못했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성령을 받게 되면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자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는 자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행동합니까?
그야 당연히 사람의 지혜대로 하는 것입니다.
암몬이 다윗이 은총을 베풀때 므비보셋처럼 그 속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지혜를 발휘합니다.
틀림없이 다윗 저놈이 우리를 정탐하기 위해 신복을 보냈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게 사람의 지혜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결국 멸망할 자들은 멸망당해야하는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생생했겠습니까?
2천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불과 몇일 지났고 그 증거들도 여럿 남아 있을 텐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 시절에 살았다면 믿었을 텐데..
이런 말은 텍도 없는 소리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주님되신 예수님이 주신 성령을 받은 자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은총을 베풀어도 구원받지 못할 자는 못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끊임없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이 드러나도록 말입니다.
사람의 지혜로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도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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