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강해

강해 6

푸른 섬 2010. 7. 30. 09:11

죄를 보이리라

미가3장1-12

오늘 여러 부류의 주인공의 등장합니다.

먼저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을 봅시다.

이들은 공의를 행해야 하는데 공의를 걷어 차버렸습니다.


이들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의 가죽을 벗겼습니다. 또한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족을 벗기며 그 뼈를 꺽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했습니다.


무엇을 표현하는지 아시겠지요.

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여호와의 백성을 잡아먹는 짐승의 고기처럼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누굽니까? 야곱의 두령들이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선 도무지 공의 즉 사랑이라는 것을 눈꼽 만큼도 찾을 수 없습니다.


공의와 사랑은 정 반대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는 공의를 제대로 행하게 된다면 자동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공의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긍휼없음, 사랑 없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의와 사랑은 한셑트입니다.


이들에겐 여호와께서 어떻게 보응하실까요?

이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십니다.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겠다는 것이지요. 사랑을 베풀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공의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가린다는 것도 마찬가지의 의미입니다.

긍휼없는 심판을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선지자들입니다.

이들도 물론 이스라엘과 야곱의 지도자급에 해당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도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행했는냐?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않으면 전쟁을 준비합니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입에 맛 있는것 넣어주면 평강을 예언합니다.

그런데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않으면 저주를 퍼 붓습니다.


어디서 많이 보든, 듣든 내용아닙니까?

많이 바치면 복 많이 주시고, 적게 바치면 복 적게 주신다고 외치는 목사들.


똑 같죠.

예나 지금이나 죄인은 바뀌지 않습니다.


돈 싫어하는 선지자 없고 돈 싫어하는 목사 없죠.

그래서 선지자나 목사는 돈만 입에 콱콱 채워주면 평강을 외쳐줍니다.

그런데 돈을 숨이 넘어 가도록 입에 콱 채워주지 않으면 불길한 말을 솥아냅니다.

불안하게 만들어 버리죠.


그래서 돈 내지 않고 못베기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제가 어릴때만 해도 몸으로 교회봉사해도 대단하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돈의 위력이 오늘날 만큼은 되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노동의 가치를 조금은 인정하던 시대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무리 봉사 열심히 해도 돈 못내면, 돈 안내면 별로 인정 못받습니다.


그래서 돈 없는 사람 장로 못하잖아요.


물론 장로하다 망한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몇백, 몇천 내지 않으면 장로 할수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해도 돈을 콱 입에 넣어주지 않으면 장로가 될수 없어요.


이들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심판은 밤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 철저하게 부끄러움 속으로 몰아 넣어신다는 것입니다.


수치를 당하게 하신다는 것이지요.


6절을 보면 선지자가 완전히 점장이입니다.

오늘날 목사들과 같죠.


11절을 보세요.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을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친다고 합니다.


그러고 하는 말이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뇌물, 삯, 돈만 밝히는 자들이 두령이요 제사장들이요 선지자들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

현시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미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에서 다 들통났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니 이들이 하는 짓이란 그 말씀을 이용해 돈벌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령들이 되었던 제사장이 되었던 선지자가 되었던 돈만 되면 무슨 짓이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룰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심을 확신하면서 돈 벌이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령들이 왜 뇌물을 위해 재판합니까?

그 원인이 어디있을까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들에겐 여호와의 말씀이 이미 무시되었습니다.


그러니 뇌물을 위해 재판하는 것이지요.

재판을 어떻게 해야합니까?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을 따라 재판을 해야지요.

인간이 만든 규례를 따라 재판하면 안되지요.


그런데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을 따라 재판은 하되 뇌물을 위해 재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야 쉽지 않습니까? 권력을 가진자들에게 말입니다.

법을 이용해서 돈 벌이 하는 것 어디 한두번 봅니다.


부딪치는 곳 마다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사장들은 어떻습니까?

이들은 삯을 위해 교훈합니다.


제사장들이 무엇을 교훈합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 제사장들입니다.

그런데 돈벌이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칩니다.


돈 안 주면 교훈안합니다.

그러면 돈 주면 교훈을 하는데, 어떤 교훈을 할까요?

어떤 것을 가르칠까요?


그야 뻔하지요.

평강 평강, 축복, 축복을 교훈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있는 좋은 말만 뽑아 가르치지 않겠습니까?


귀에 거슬리는 것들은 빼버리고, 그래서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걱정하지 마세요.

재앙은 우리에게 절대로 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선지자는 돈을 위해 점 친다고 합니다.

성경을 번역해도 어떻게 이렇게 잘 번역해 놓았는지.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들이 선지자들이죠.

그런데 무얼한다고요.

점친다는 것입니다.


점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앞날에 대해 예언해 준다는 말인데.


사람들이 왜 점을 칩니까?

잘 되려고 점칩니까 못 되려고 점칩니까?

잘 되려고 점치죠.

그래서 점쳐보고 이상하면 그 나쁜 일을 피하기 위해 개고기도 안먹고 과부해는 결혼도 안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지금 점치는 자들로 행세하는 것이지요.

돈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짭짤하겠습니까?

오늘날 이런 점쟁이 목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부자된 자들이 대단히 많죠.


그러면 선지자들이 주로 무엇을 예언하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길한 일 아닙니까?


흉한일을 말하면 안되죠.

돈이 안됩니다.


흉한일을 말하더라도 피할 길을 알려 주어서 길한 일로 바꾸어 주어야 하겠지요.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시기가 B.C. 700년 경입니다.

그렇다면 2700년 전에 일어난 일과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일, 전 세계교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교회밖의 일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라는,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걸고 생활하는 집단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어찌그리 똑같을까요?


두령들이나 치리자들, 선지자들, 제사장들, 이들에겐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없습니다.

이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돈 밖에 없습니다.


살아보니 뭐니뭐니 해도 머니라고 하잖아요. 마니라고 발음을 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오래 살수록 무엇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합니까? 돈이지요.

돈의 위력을 두령들이나 치리자들 선지자들, 제사장들, 소위 지도자급에 있는 자들이 더 빨리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율법을 돈 되는 율법으로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 목사들이 말씀을 돈벌이 수단으로 바꿔치기 한것을 별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2700년 전에 다 해 먹었던 짓거리입니다.


자 이제 이들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철저하게 말씀을 복으로 해석해 냈습니다.

평강으로 해석해 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선지가 미가 선지자는 어떻게 예언했을까요?

8절을 봅시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어서 내밷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입은 자가 말하는 내용이 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두령과 치리자들, 선지자들, 제사장들은 무엇을 이야기했다는 말입니까?

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절대로 죄를 언급하면 안되죠.


죄를 언급하게 되면 상대를 기분나쁘게 하죠, 그러면 돈이 안 나옵니다.

죄를 언급하게 되면 심판이라는 것이 언급되고 재앙이라는 것이 언급되기 때문에 절대로 죄를 이야기 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도 동일 법칙이 됩니다.

예수님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 제사장들에게 죄를 지적하면 안됩니다.

죄를 지적하면 죽습니다.


그래서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16장7-11절을 봅시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면 책망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망을 누가 받습니까?

보혜사 성령을 받은 사람만 책망 받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이 책망을 받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책망 받는 복음을 전하니 어떤 자들을 찔려 회개하였고 어떤 자들을 찔려 죽이라고 덤벼더는 것입니다.


사도행전2장37절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또 다른 부류를 봅시다

사도행전7장54절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한쪽은 어찌할꼬로 나오고 다른 한쪽은 이를 가는 장면으로 나옵니다.


여러분,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그래, 돈을 위해 일하지 않는 목사를 찾아야지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런 목사 없습니다.

삯을 위해 일하지 않는 자는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기회만 되면 다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오늘 본문을 통해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참 선지자의 말입니다.


죄를 보이는 목사, 죄를 보이는 성도, 죄를 보이는 장로.

이런 자들이 참으로 성령받은 자들이요, 구원얻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무슨 죄를 보이는 목사여야 하며 무슨 죄를 보이는 장로여야 하며 무슨 죄를 보이는 성도여야 합니까?


십자가의 피로 용서하시는 은혜를 거부하는 죄를 보이는 목사 , 장로, 집사, 성도야 참 주님의 백성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또다시 이렇게 해석합니다.

공의를 행하는 치리자, 하나님이 말씀을 말씀대로 전하는 선지자, 목사를 외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바른생활, 사회에서 모범이 되는 사람 만들기에 힘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전하는 바른 목사.


이런 인간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 참선지자는 죄를 그들 자신에게 보이는 자가 참 선지자입니다.


사도행전5장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옵니다.

 이들이 헌금을 했습니다.

소유를 팔아 얼마는 감추고 얼마는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들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죄를 들추어 냅니다.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이들 둘다 죽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같으면 어떻게 처리할까요?

그래요. 소유를 팔아 얼마라도 헌금 했으면 대단합니다.

그래요. 계속 교회 다니세요.

주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당신들 정성을 다해 헌금했으니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주님께서는 돈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관심이 없습니다.


십자자 지신 그분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주님으로 살아계심을 전하시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받은 베드로가 돈에 관심이 있은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인 것에 관심을 둔 것입니다. 성령을 속였다는 말은 곧 주님이 지금 살아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님을 돈을 갖고 죽은 분으로 취급하니 이런 자에겐 죽음이 마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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