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아내지 못하였더라
음성설교
사사기 1장1-21
사람은 무엇을 가장 소망할까요?
왜 사람들은 돈을 벌어도 더 벌려고 합니까?
왜 자녀들이 공부를 더 잘했으면 할까요?
왜 더 좋은 집, 더 좋은 자동차를 갖고 싶어합니까?
왜 더 예뻐지려고 성형을 합니까? 그냥 그대로, 그냥 이대로 살면 되지 않을까요?
성경말씀처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니 입는 것, 먹는 것, 그냥 지금의 모습대로 족한 줄 알고 살면 안 될까요?
디모데전서6장10절 말씀을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지요.
참 재미있는 표현 아닙니까?
아니 돈이 무슨 악의 뿌리가 됩니까?
마태복음6장24절에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과 재물을 왜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까?
돈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잘 섬기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돈과 하나님이 병립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느냐 말입니다.
우리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둘 다 병립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이것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부터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할 수 있다는데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일만 악의 뿌리냐 말입니다.
나는 돈도 열심히 벌면서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다고 단언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변망할 것입니다. 나는 돈을 사랑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돈은 열심히 벌어요라고 말입니다.
그게 그것 아닙니까?
돈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땅에서 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람들과 만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없으면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겁납니다.
저쪽이 밥을 사면 나도 한번 밥을 사 주어야지요.
저쪽이 명품 옷을 입으면 나도 입어야 하고, 저쪽이 명품 가방 들면 나도 명품가방 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호텔에 한번 밥 먹으러 가더라도 값비싼 차가 아니면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잖아요.
그런데 한번 봅시다.
예수님 안 믿는다고 밥을 굶습니까?
예수님 안 믿는다고 호텔 못 들어 갑니까?
예수님 안 믿는다고 사람 만나지 못합니까?
가능하면 예수님을 안 믿는 척 해서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까?
그래야 상대가 부담이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돈은 없으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안정을 가져다줍니다. 불안감을 해소해 줍니다. 물론 이런 안정감을 얻으면 또 다른 불안이 찾아 오지요. 그래서 신을 찾습니다. 예수님도 찾습니다. 십자가도 찾습니다.
돈이 없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안정, 평안을 가기기 위해 돈을 벌고, 신을 찾고 종교생활을 합니다.
경제적으로 살기가 좋아지니 정신병자들이 노골적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 아닙니까? 돈이 많이 주어지면, 굶주림이 해소되면 불안감도 살아져야 하는데.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불안감이 사람 마음 속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불안감은 안정을 찾아 방황하게 만듭니다.
왜 자꾸 인간들은 안정을 찾을까요?
왜 자꾸 인간들은 불안할까요?
창세기를 보면 인간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인간들은 불안감이 찾아옵니다. 공포감이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해법을 찾았습니다. 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해법을 주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 해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주실 때 비로소 불안감은 사라집니다.
참 평안을 얻게 됩니다.
이전 에덴동산에서 가졌던 평안은 하나의 본보기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참 평안에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요한복음14장27절을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성도에게 주는 평안은 예수님의 평안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소유함으로 얻어지는 평안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세상에서의 평안은 무엇으로 얻습니까?
무화과 나뭇잎입니다.
소유입니다.
무엇을 가짐으로 평안을 얻습니다.
돈이 되었던 옷이 되었던, 집이 되었든, 지식이 되었든, 무소유가 되었던 아니면 자신이 꿈꾸는 세상이 되었던 아무튼 무엇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얻는 평안입니다.
물론 이 평안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인간 속에는 언제나 결핍입니다.
늘 부족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샘솟듯하는 결핍입니다.
아무리 파 내어도 파 내어도 계속에서 솟아 나옵니다.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이 결핍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말합니다.
아니면 이 결핍이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 낸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랍니다.
그러나 아무리 욕망을 발산해도, 아무리 새로운 것을 만들어도 자꾸자꾸 만들고 싶고 자꾸자꾸 하고 싶은 것이 생깁니다.
통제 불능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욕망을 채워주고, 아니면 다른 것으로 대체하거나, 새로운 것을 만듦으로 불안감을 해소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쁨을 얻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어떤 평안일까요?
예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점령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점령당하게 되면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됩니다.
결코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에 의해 철저하게 십자가의 능력을 전합니다.
그 인생이 자기를 부인하는 인생입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인생입니다.
십자가의 피만 전하게 되는 인생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성도가 반복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평안을 추구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먹을 것을 위해, 아니면 권력을 위해, 아니면 자신이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께 다가온 자들은 예수님께 왔다가 그냥 갑니다.
디모데전서4장10절을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여기에서 서로 비교 되는 것이 있지요.
나와 데살로니가, 나와 갈라디아, 나로 달마디아, 즉 나와 세상이 비교됩니다.
왜 바울과 데살로니가, 바울과 갈라디아, 바울과 달마디아가 비교됩니다.
서로 하나 되면 안 됩니까?
왜 둘은 원수관계가 됩니다.
바울의 삶을 보면 왜 데마, 그레스게, 디도 바울 곁을 떠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삶은 증인의 삶이었습니다.
남은 것이 없습니다.
수십 년간 목회하면 재산이라도 남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수십 년간 목회하면 퇴직금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수십 년간 목회하면 자녀에게 물려줄 재산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수십 년간 목회하면 집이라도 한 칸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없어요.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젠 죽을 일만 남았어요.
죽는 것도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 갇혀 죽어요. 모든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죽어요.
무엇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습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전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곤 십자가 지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사도바울과 함께 한다는 것은 곧 세상과 결별이라는 뜻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7,8절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족한 줄 알고 살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말도 어려운 말이지요.
문제는 바울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십자가의 복음만 전하면서 살았습니다.
물론 돈도 벌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인생이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전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디모데전서6장7,8절의 말씀이 그에게 덮쳐졌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도무지 데마나 그리스게나, 디도에겐 맞지 않아요.
처음에는 그럴듯해서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전했다간 세상에서는 버림을 받는 인생이 되는 것을 알았어요. 누구를 보고요. 사도바울을 보고 말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으로 가버립니까?
믿는 것도 한번 두 번이지. 오늘날 목사들이 그렇지요.
처음에야 예수님만 전했지요.
그런데 차츰차츰 알아가게 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십자가를 부인해야 된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가봅시다.
사사기 1장을 다 읽어 보면 그 내용이 씁쓸합니다.
처음에는 유다지파가 아도니베섹을 하나님의 원수로 죽입니다.
그런데 19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라고 합니다.
21절을 보면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요셉족속은 어떤 한사람과 그의 가족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27절부터는 계속해서 쫓아 내지 못했다는 것이 연속됩니다.
이들이 힘이 강해서 쫓아내지 못했을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일까요?
철병거가 있다고 해서 쫓아내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쫓아내지 않은 자들을 다 사역자로 삼았습니다. 일꾼으로 삼았지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힘이 없어서 진멸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활용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꼭 지켜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34절을 봅시다.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 드리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결심하고 헤레스산과 아얄론과 사알 빔에 거하였더니 요셉 족속이 강성하매 아모리 사람이 필경은 사역을 하였으며”
단 자손은 오히려 아무리 자손에게 쫓겨 산으로 가서 거하게 됩니다.
아모리 사람들은 오히려 결심하고 헤레스산과 아얄론과 사알 빔에 거합니다.
물론 나중에는 요셉 족속에 의해 사경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들 나름대로 살길을 찾았다고 볼 수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뒤쪽으로 가버렸습니다.
오히려 가나안 거민들을 살려 두는 것이 좋아요. 우리 같으면 이들을 살려두는 것이 불안하지 않을까요?
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거민을 살려두었었을까요?
재산이 되잖아요.
살아가는데 평안하잖아요.
과거 자신들이 살았던 그 인생. 종의 인생에서 이제는 주인의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이것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좋은 것을 두시고 다 진멸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런 의문 들지 않겠습니까?
내가 편하고, 내가 좋으면 되지 않습니까? 왜 꼭 진멸해야 합니까?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평안과 즐거움을 선택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이유와 같은 맥락입니다.
살고 싶다는 것이지요. 내 마음대로. 왜 예수님이 내 인생에 방해를 놓느냐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왜 나의 삶에 방해를 놓습니까?
이제 지나온 것은 싹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그것도 지금의 자기자신.
사실 인간에겐 지금밖에 없고요.
그런데 사도행전4장19,20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이제는 권력 앞에서 , 죽음 앞에서 당당합니다.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것입니다. 자신들도 자신들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린 늘 이스라엘처럼 내 평안, 세상의 평안을 구하면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렇게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버려두게 되면 데마나 그리스게나 디도처럼 되겠지요.
그러나 성도는 결코 그렇게 버려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다 너희들의 평안을 위해 사는 자라고 외치면서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셨음을 담대해 외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