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 강해 3 성탄과 애굽

푸른 섬 2011. 12. 25. 13:10

사사기 강해 3 성탄과 애굽

애굽



음성설교

사사기2장6-15

이스라엘은 애굽땅에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애굽땅에서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출애굽기3장9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애굽땅에서 괴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학대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부르짖었습니다.

물론 이 부르짖음은 자신들의 탄식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부르짖음은 아닙니다.

삶이 너무너무 고달프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애굽에서 떠나고 싶은 생각은 죽어도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실 때 모세가 먼저 어떻게 말합니까?

출애굽기4장1절입니다.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모세의 말이 옳았습니까 옳지 않았습니까?

옳았지요. 이유는 이들이 모세가 행한 이적을 보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이적을 보고 믿어 본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모세 때문에 짚도 없이 벽돌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만들지 못하니 이스라엘 패장들을 때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지요.

그렇지 않아도 그냥 애굽에서 살면 좋겠는데 , 학대받고 괴로움 당해도 여기가 좋은데 왜 우리를 약속의 땅이니 뭐니 하는 곳으로 데려 가려고 하느냐 말입니다.

출애굽기5장21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심입니다.

그냥 지금 이대로 살게 해 내버려 두라는 것이지요.

힘들고 괴롭지만 지금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 없습니다.

모세가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합니까?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출5장22-23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들 모두의 관심은 자기 자신입니다.

약속의 땅에는 처음부터 관심 없습니다.

이렇게 이들은 애굽에 머물려고 했지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모세를 강권적으로 보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떠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들이 이스라엘백성들의 본 모습니다.

이들이 약속의 땅에 오게 된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여호수아가 죽고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까지만 여호와를 섬깁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다고 하지요.

모세를 처음 애굽에 보냈을때의 상황과 똑 같지 않습니까?

이적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믿은 저들이나 지금 약속의 땅에 들어 와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까지만 여호와를 섬긴 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마치 애굽을 반복하고 있지요.

장소야 가나안 땅이지만 실제로는 애굽에 있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았습니다.

다른 신들이란 자신들이 사는 곳에 있는 백성들이 믿는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였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그냥 섬긴 것이 아니고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이들은 풍요의 신입니다.

바알은 남신아고 아스다롯은 여신입니다.

이들 신은 오직 사람들을 위한 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한다는 것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남을 위한다.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가나안 사람들은 누구를 위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을까요?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입니다.

애굽에서 살 때 이들은 누구를 위해 살았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자신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 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들이 자신들을 위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도, 이 땅을 차지하게 된 것도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깁니다. 이들에게 절하는 것이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자신들을 위해 축복을 덤뿍덤뿍 내려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축복일 뿐입니다.

축복을 받더라도 나를 위한 축복을 받고 싶습니다. 신들도 나를 위해 존재해야 제 맛입니다.

신들이 신들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똑똑합니다.

프레이저라는 사회인류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기 인간들은 무엇보다도 실제적인 목적을 위하여 자연의 과정을 조정할 것을 추구했고 그들의 의식이나 주문에 의해 그것을 직접적으로 수행했다. 이후 그들의 주술적인 능력의 한계를 깨닫자 그들은 두려움이나 희망 속에서 혹은 탄원이나 도전 가운데서 보다 높은 존재들, 즉 조상의 영들이나 신들에게 호소를 하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들이 무엇보다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라는 말이 나오지요.

이 사람이 뼈 빠지게 연구해 놓은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인간들은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들고 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얻고자 하는 바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자기를 위한 신, 자기를 위한 축복, 오직 자기를 위한 것만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싫습니다.

그곳이 천국이라 할지라도 싫어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무리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들을 인도하신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싫습니다.

오늘이 성탄절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우합니까?

자기를 위한 예수로 만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는 죽여야지요.

얼마 전에 텔레비전뉴스를 보니 절간에서 성탄 트리를 만들고, 그곳에서 크리스마스캐롤을 부르는 것이 나왔습니다. 예수도 인류를 위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13-15절입니다.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게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태어 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강력한 힘을 소유한 사람, 헤롯왕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지만 헤롯왕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까?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애굽으로 피신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까지 제가 말씀을 드렸지요.

애굽은 어떤 곳이라고요? 오직 자기를 위해 사는 곳이 애굽이라 했습니다.

그곳이 힘들어도, 고되어도, 축복이 있어도 없어도 오직 자기를 위해서라면 상관없이 살고 싶은 곳이 애굽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셨습니까?

애굽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호세아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셨다고 합니다.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호세아11장1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이 말씀은 출애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애굽으로 가신 일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뭔가 맞지 않지요.

애굽은 애굽일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에 의하면 어디가 애굽이라는 말입니까?

유대 땅이 애굽이라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애굽땅, 즉 이집트가 애굽이었지요. 그런데 마태복음2장 말씀을 보면 유대 땅이 애굽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 외에는 다 애굽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사사기2장에서 약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유대 땅이 애굽땅이라 규정하셨습니다.

유대 땅이 애굽이라는 말은 온 세상이 애굽이라는 말입니다. 온 세상은 오직 자기를 위해 사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즉 우상숭배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11장3-8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다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여기에 애굽이 나오지요.

애굽과 소돔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을 동일시하지요.

소돔 땅이 왜 멸망당했습니까?

의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롯의 처입니다.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롯의 처의 관심이 어디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이 살든 곳, 재물, 정든 땅. 친구, 가족 등등.

자기 자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어요.

이런 곳이 애굽이요, 이런 곳이 소돔이요,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애굽이 좋아요. 소돔이 좋아요.

내 소유가 있고 내 몸이 머무를 곳이 있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이 존재 하는 곳이 좋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있는 것은 다 싫어요. 그러니 예수님을 위해 있어야 한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죽여야지요.

두 증인들이 왜 죽습니까?

이들은 물론 권세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권세입니다. 그런 이 권세는 증거를 마칠 때까지 권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스데반과 같은, 아니면 사도바울과 같이 죽이실 때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할 권능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도 입장에서는 언제 끝날지 몰라요. 그러나 이들은 십자가 복음만을 전합니다. 또한 십자가 복음만을 전하다가 죽을 뿐입니다.

성탄 캐롤이 울려 퍼지는 이곳이 골고다입니다. 이곳이 애굽입니다. 이곳이 소돔입니다.

오직 자기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인생 가운데 십자가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이젠 자신이 애굽이요, 자신이 소돔이요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임을 압니다.

그래서 전할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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