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강해 2

푸른 섬 2011. 12. 18. 23:00


보김



음성

사사기2장1-5

아이는 책임감을 어떻게 배우나 라는 책이 있습니다.

화내지 않고 잔소리 하지 않고 아이의 책임감 키우기

제가 읽어 본 바에 의하면 핵심은 부모가 본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즉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대하는냐에 따라 자녀가 어떻게 자라는지가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헬리콥트형 부모, 제트 터보 헬리콥트형 부모, 카운슬러형 부모를 언급합니다.

헬리콥트형 부모는 아이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아이가 구조를 요청할 때 근처에서 날고 있던 헬리콥트형 부모는 단숨에 내려가 아이를 교사, 친구, 위협적인 요소들로부터 보호한다. 역설적이게도 헬리콥트형 부모가 이상적인 부모로 비칠 때가 많다. 그들은 아이가 실제로 삶에 부딪히며 배울 수 있도록 믿고 지켜보지 못한다.

두 번째는 제트 터보 헬리콥트형 부모입니다. 아이에게 완벽한 세상을 안겨주려고 합니다. 이들은 아이를 구조 보호하는데 그치지 않고 , 자기 아이의 행동에 책임을 묻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공격하기 위해 미사일을 장착하고 총을 난사하며 나타납니다.

세 번째는 훈련관형 부모입니다. 고함지르고 아이를 휘어잡습니다.

네 번째는 자유방임형 부모입니다. 아이의 손을 놓아버립니다.

그리고 이 저자가 주장하고파하는 카운슬러형 부모를 언급합니다.

따듯함과 엄격함의 균형을 이루는 부모가 카운슬러형 부모랍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언급합니다.

실패할 기회가 없으면 성공할 기회도 없다. 책임감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익히는 것이다. 아이의 강점을 믿어줄 때 아이의 책임감도 자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부모가 좋은 본을 보여라고 합니다.

설교시간에 웬 자녀교육강의를 하느냐고요.

아마 자녀를 키우는 분이라면 이런 이야기가 귀에 속속 들어오지 않습니까?

바로 나는 어떤 부모일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부모가 되어야 되겠다는 결심도 하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성경이야기만 하면 다 졸아요. 아니면 딴 생각을 해요.

참 희한하지요.

왜 그럴까요?

자녀교육이야기는 내 몸과 관련되어 있어요. 당장 눈앞에 닥친 일입니다. 그러니 내 현실과 관련되니 귀에 속속 들어오겠지요. 물론 자꾸 들으면 별거 아니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자녀교육을 제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공부 열심히 해요.

책도 많이 읽어요.

그런데 성경은 왜 덮어 버릴까요?

왜 설교 듣는 것은 별로 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보김이라는 곳이 나옵니다.

백성이 소리 높여 울었기 때문에 그곳 이름을 보김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소리 높여 울었습니까?

1절부터4절까지 한번 다시 읽어 볼까요?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귀에 속속 들어옵니까?

잘 들어오지 않지요.

자녀 교육문제 같으면 눈을 부릅뜨고 귀에 속속 들어 올 텐데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소리를 높여 웁니까?

객관식으로 한번 해 봅시다.

1번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회개의 눈물로

2번 이방인과 함께 거하는 것이 기분 나빠서

3번 가나안 거민들이 자신들의 옆구리에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이 올무가 되기 때문에.

몇 번입니까?

3번이지요.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만일 우리의 잘못에 지적을 당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방금 자녀교육에 대해 들었지요. 눈물을 흘릴 수도 있겠지요. 내가 잘못했구나. 그러면서 반성하고 제대로 해보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울까요?

그래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어. 그러니 정말 우리가 잘못했구나.

하나님 우리를 용서해 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런 마음으로 울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운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왜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어렵게 어렵게 들어 왔는데 가시, 올무가 있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이제 좀 주인노릇하며 편하게 살수 없느냐 말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운 것입니다.

제사 드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를 왜 드렸을까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해서 제사를 드렸을까요?

아닙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해서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저주가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지금 분합니다. 억울합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평안한 삶을 살지 못한다 말입니까?

아마 이런 울음을 우는 사람 엄청나게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인생의 길이 쫙 펴일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지 않고 꼬이고 꼬이니 눈물을 흘리지요.

왜 그렇습니까?

겉으로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하지만. 그 내면에서 왜 나를 이 모양으로 살게 하고 이 지경에 이르게 했습니까 라고 대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 그 마음에 변화가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회개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 눈물 속에 이런 반항이 담겨 있음을 본인이 몰라요.

물론 아는 사람도 많지요.

요한복음11장에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래요.

이들의 눈물이 어떤 의미의 눈물인가요?

예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사람들은 본인이 지금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저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아요.

왜 그렇습니까? 처음부터 복음을 몰랐어요.

복음을 알았다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에 대해서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감사하겠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마태복음2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1-8절입니다.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그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동방의 박사들을 어디로 인도 하셨습니까?

헤롯왕에게로 인도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 났습니까?

난리가 났지요.

그런데 헤롯은 냉정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일제히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다 알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보다 더 잘 알아요. 그러나 지금이 그 때인지 알지 못해요.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와서 일깨워 주었으면 그들도 함께 경배하러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관심 없습니다.

다만 유일하게 지극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헤롯왕 밖에 없습니다.

헤롯왕이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집니까?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확실하게 찾아서 죽이겠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지금 유대인의 왕인데 자기 말고 누가 왕이 된다는 말입니까?

16절을 봅시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베들레헴과 그 모든 근처에 있는 사내아이를 다 죽였습니다. 물론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때를 표준 하여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다 죽였습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이러했습니다.

슬픔이 가득한 날이었습니다.

정말 눈물이 쏟아지는 날입니다.

아이의 죽음을 맞은 부모들 심정 어떨까요?

헬리콥트고, 슈퍼제트 헬리콥트고, 카운슬러가 어떻고 이런 것이 나옵니까?

이게 무슨 상관있습니까?

자식이 죽었는데. 그러면 울겠지요. 분노의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18절 봅시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 졌느니라”

이 말씀은 예레미아31장15절 말씀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예레미아31장으로 가보면 15,16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일니라”

포로로 잡혀 가서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말씀이고 포로에서 돌아온다는 말씀입니다.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유는 라헬이 자식을 위한 애곡입니다.

그런데 그냥 울게 두랍니다.

위로받지 않겠답니다.

위로받기를 거절합니다.

이 말씀이 지금 예수님의 탄생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과 그 지경의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이 다 죽었습니다.

슬픔의 날이요 통곡의 날입니다.

이들이 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식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위로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위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사람들의 위로 아닙니까?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들의 위로가 큰 힘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이런 위로 거절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들이 왜 사람들의 위로를 거절할까요?

왜 땅의 위로를 거절합니까?

그것은 위로 자가 따로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위로가 그냥 위로가 아닙니다.

살아서 돌아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들의 위로를 거절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죽은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살아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으로 인해 죽임당한 아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부모는 사람들의 위로가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과 오늘 본문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울음이 나오지요. 두 곳 다 소리쳐 외쳐 우는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합니다.

그런데 보김에서의 울음은 어떤 의미의 울음이었습니까?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성취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가시와 올무가 있음이 당연함으로 받아야 할 터인데 왜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십니까?

왜 우리에게 이런 괴로움을 주십니까?

제발 이 땅에서 좀 편하게 살게 해 주세요.

말씀이고 뭐고 지금 내 몸이 중요합니다. 내 가족이 중요합니다. 왜 이렇게 우리를 괴롭히시나요의 울음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보니 통곡하는 그 통곡은 말씀대로 이루어주시옵소서라는 통곡입니다.

내 위로는 필요 없습니다.

내 자식의 죽음조차도 예수님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고 이 죽음을 근거로 다시 살리심은 예수님이심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라는 울음입니다.

자식이 죽었으면 울지 않을 부모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울음을 이렇게 바꾸셨습니다.

사람의 위로는 필요 없습니다. 말씀대로 이루어 주소서라고 말입니다.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이 생명의 주시오 만유의 주님이심을 드러내소서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항상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자기 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괴롭히면 가만두지 않습니다.

마태복음24장51절을 보면 지옥간 자들이 하는 일이 나옵니다.

슬피우며 이를 간답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분함을 나타냅니다.

설교 서론에서 자녀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여기에 십자가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야기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로 시작해서 자기 자신으로 끝납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서 읽지요.

이들은 십자가에 대해 관심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제거해야 될 제 일순위입니다.

자신이 왕이 되려는 것을 방해하는 또 다른 왕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이야기는 별로 재미가 없어요. 관심도 없고요.

그런데 성도는 예수님 때문에 괴롭힘을 당합니다. 고난을 당하지요. 그래서 그냥 당합니다.

울음 있습니다. 통곡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에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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