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음성
로마서1장1
어린이들에게 너 천국가고 싶니라고 하면 백이면 백 명이 네 가고 싶어요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다를까요?
어른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지옥가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천국가고 싶어 하지요.
가끔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난 지옥가도 좋아. 그래도 예수님은 믿지 않겠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지옥을 그렇게 싫어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지요.
문제는 어린이들이 가고 싶다는 그 천국, 어른들이 그렇게 바라는 그 천국은 지옥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구원을 바랍니다. 구원받기 싫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오죽하면 자살까지 하겠습니까?
아침에 밖에 나갔다 오는 중에 선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구원받고 싶으면 그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왜 새벽잠을 설쳐 가면서 교회당에 나와 기도하겠습니까?
자신이 망하기를 기도하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주님을 위해 죽기를 기도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골로새서 1장24절 말씀처럼 복음전하다가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게 해 달라고 기도할까요?
어느 누가 이렇게 기도하겠습니까?
자식이 복음 전하다가 고난 받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부모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부모 있을까요?
사람들은 눈만 뜨면 어떻게 하면 구원 얻을까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주일날 모여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설교를 들을까요?
당연히 자기 구원을 위해 설교를 듣게 됩니다.
복을 받겠다는 것의 궁극지점은 구원에 있어요. 주님 앞에는 중립지대가 없어요.
그러니 목사들이 이 구원을 위해 소리소리 지르며 설교하고, 소리소리 지르며 기도해 주잖아요.
예수님입장에서, 죽임 당하신 하나님 입장에서 설교하면 사람의 형편 전혀 고려대상이 안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인을 두고, 그 형편을 이해해주고, 설득하려 든다는 자체가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을 이해할 때 자신을 위한 구원이라 생각합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구원.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려도 결국 그 결과물은 자신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어요.
로마서 1장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종이라는 말이 나오면 떠오르는 말씀이 있나요?
요한복음8장입니다. 32절에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눈으로 목격하고 말씀도 들어 보니 믿을 만하여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따라서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은 줄곧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니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너희들은 죄의 종이라, 아들이 너희들을 자유케 하면 참으로 자유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예수님을 믿은 자들에게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들을 향해 너희들은 마귀새끼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예수님을 믿은 이들은 결국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을 때에는 자신이 처음에 누구의 종이었는가를 분명히 깔고 있습니다. 바로 죄의 종이었고, 마귀새끼였음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출애굽기20장을 보게 되면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말씀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이제 너희들은 누구의 종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바탕작업이 되어 있습니다.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셨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6장으로 가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8장을 말씀하시듯이 죄의 종을 말씀하시면서 의의 종, 즉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스라엘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43장10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니라”
여기에서도 독특한 한 가지 사실이 있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지만 그 전에는 애굽의 종이었습니다.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 잡힌,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구원해 주시면 될 일을 왜 이렇게 애굽의 종, 바벨론의 종으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셨는가입니다. 그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종인 이스라엘, 즉 참 이스라엘을 자신의 피로 구원하시는 일을 보여 주시기 위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일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이 있지요. 죄의 종, 애굽의 종, 바벨론 종. 이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의의 종, 하나님의 종이 되면 끝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렇지 않나요. 구원받았으면 되었지 과거는 왜 물어? 이런 식이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과연 우리들이 생각하는 식으로 의의 종이 되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느냐 말입니다. 그렇지 않지요. 그러니 예수님을 전한다. 예수님이 왕이심을 전한다는 말을 육적으로 이해하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됩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종이지요. 예수님의 종이라고 할때 반드시 바탕에 무얼 깔아 놓습니까? 자신이 죄의 종이었던 사실을 깔아놓지요. 이것도 과거형이 아니고 현재형으로 깔아 놓습니다.
이렇게 될 때 증거되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 믿는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일한 것을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구약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구약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복음서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마는 사복음서도 구약을 깔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구약을 제대로 알아야 하겠지요.
애굽땅 종 되었던 자를 구원해 주고,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해 주어도 결국 이들은 죄의 종이었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자들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위치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는데 선봉장이었습니다. 잡아서 뭐합니까? 핍박하고, 고문하고, 결국 죽이는 일을 했잖아요.
이것을 사복음서로 가져가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 헤롯왕, 본디오 빌라도와 동일한 행동을 한 것이지요. 죄의 종으로서 말입니다.
이런 죄인인 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요.
베드로와 다르지 않지요.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했잖아요.
바울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가, 십자가 사랑이 어떠한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 그러니 너희는 내 말을 들으라 이런 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도가 가야 할 길은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십자가의 길 밖에 없어요.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1장 4절을 보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그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택함 받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너무 좋지요. 그런데 이 택함이 누구를 위한 택함이냐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았다는 것은 로마서1장1절에 나오는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만을 전하도록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누구 소유라는 말입니까?
예수님 소유라는 말입니다. 자기 것은 있어요 없어요. 없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은 죄의 종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세울게 뭐가 있어요. 십자가 복음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를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구원의 확신으로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구원파처럼 나 몇 날 몇 시 몇 초에 구원받았다고 해야 구원받은 것일까요?
아니면 난 죄 없어, 난 예수님 믿어라고 하면 구원받은 것일까요?
사람들은 구원을 소유하고 싶어 하지요. 이것도 구원받고 싶은 욕망과 연결되어 있어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확실한 것을 붙들지 않고 자기 몸에서 나오는 것으로 확실한 구원을 붙들려고 해요.
성령 받은 사람은 자신이 어떤 자인지 알아요.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만을 전하면서 살아요.
자신이 누구를 위해 이 땅에 살고 있는지를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사야43장10절을 다시 보면 종으로 택함을 입은 자는 어떻다고 합니까?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어떻게 보면 완전히 영지주의잖아요. 알고 믿고 깨달으면 된다. 그 다음은, 행위는.
우리의 논리가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게 예수님께서 줄곧 하시는 말씀이고 우리들이 살펴 보고자하는 로마서에서 줄기차게 하시는 말씀 아닙니까? 왜 그럴까요?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셨고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행했습니까? 지켰지요. 율법을 지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것은 뭐밖에 없다? 죄밖에 없다. 죄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
그렇다면 성도에게 나오는 모든 것은 뭐가 된다. 죄가 되고, 또한 그 일은 주님이 하신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무엇을 했다는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을 전합니다.
스데반이 자신이 복음 전하다가 죽은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요?
나는 죄인이요 주님이 하셨습니다. 저는 한 것이 없고 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런 죄인입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이런 식으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런 고백도 또 시간이 예수님을 죽이는 고백으로 바뀝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종은 누구를 위해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분명하게 나에 대해 말씀하시는 내용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인간들은 이런 확실하고 분명한 말씀이 싫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받고 싶거든요.
그러나 주님의 구원은 구원받고 싶은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전하는 것은 구원받고 싶은 자들이 전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구원받고 싶은 자들의 예수는 복음을 위해 부르시고 구원하신 참 예수님을 죽이는 예수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복음을 위해 택함을 입었고 종이 되었습니다. 종은 자신을 전하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