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1장33-36
32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이 말씀이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전체적인 결론 말씀입니다. 인간들의 역사가 죄 아래 가두어진 역사임을 증거하기 위한 역사입니다. 물론 이스라엘백성들의 역사가 인류역사들을 속속들이 다 파헤쳐 놓았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죄 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32절에 오게 되면 그들에게서 왜 죄밖에 나오지 않는가? 왜 그들은 조금이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수 없었는가?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반문합니다. 그럴것 같으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까?
이런 반발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차피 안될 걸 알면서 왜 율법을 주셨느냐는 반발이지요.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는 이런 반발이 나오겠지요. 그렇다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반발말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었자고 주장하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개혁주의 신학뿐만 아니라 모든 신학이 이런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이 될까요?
구약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되는데 자신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전하니 어느 누가 예수님을 인정하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믿고 성경에 나오는 말씀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끝에 나오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해하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주권을 이 땅에 실현시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되어지는 현실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주장에 동의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합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그래야 하나님 백성답고, 그렇게 요구하는 하나님이야 말로 참 하나님 같으니까요.
그런데 이 말씀이 로마서 1장부터 시작해서 32절을 거쳐서 하시는 말씀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생각은 엉터리지요. 죄아래 가두어 져서 죄가 뭔지도 모르는 인간 아닙니까?
인간들이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릴수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그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까 없다고 합니까?
어느 인간이 주의 마음을 알수 있습니까? 없지요. 어느 인간이 주님의 모사가 될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인간이 먼저 자기가 무엇을 먼저 드려 주님께 갚아 드릴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게 무슨 말입니까? 모든 만물이 주님 소유니 주님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이게 앞서 말씀드린 그런 주권신학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런뜻이 아닙니다.
모든 만물은 주님을 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에서 어떻게 주님을 전했습니까?
죄아래 갇힌 인생으로 주님을 전했지요.
그 주님이 베푸시는 긍휼을 전하기 위해 모든 인간은 죄아래 가두어진 상태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다는 말씀을 사람들은 만물의 출발점을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이 세상 신을 믿는 자 누구나 갖고 있는 생각이지요. 창조설화를 갖고 있는 나라가 상당히 많지 않습니다.
중국에는 반고설화가 있지요. 반고는 우주를 다스리는 신의 아들로 전해 집니다. 세상이 어둠으로 깜깜할때 반고라는 신의 아들이 큰 알에 있다가 눈을 떴고 도끼로 자기 몸을 에워 싸고 있는 알을 깹니다. 알을 깨는 순간 알에서 맑은 기운이 올라가 하늘이 되었고 무거운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땅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반고는 일만팔천년을 살았는데 그 동안 두손과 두 발을 뻗어 하늘을 떠 받쳤는데 이유는 예전처럼 하늘과 땅이 다시 붙어 세상이 어두어 지는 것을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반고의 입에서 나오는 숨이 바람과 구름으로 변했고, 음성은 천둥으로 변했고 그의 손과 발과 다리는 산이 되었고 두 눈은 태양과 달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몸에 있는 털은 꽃과 나무가 되었고 이와 뼈는 땅으로 내려가 금속속성의 물질로 변했다고 합니다.
반고의 죽음으로 지구가 만들어 졌다는 설화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 그대로 집어 넣으면 어떻습니까? 반고를 전하기 위해 세상은 만들어졌다. 그 반고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입니다. 너무 억지입니까? 이 땅에 어떤 것도 반고를 전하지 않는 것이 없잖아요.
오늘 본문을 이런식으로 해석해도 되잖아요. 그러면 단어만 바꾸어 주면 예수님 믿기 쉽지 않나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 하면 쉽게 받아드립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납득지 되거든요. 자기 마음속에 갖고 있는 신과 일치를 이룹니다.
그런데 36절에 나오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감이라는 말씀이 무엇에 근거하여 하시는 말씀입니까?
주님이라는 분이 설명 되려면 반드시 무엇과 만나야 합니까?
죄와 만나야 합니다.
불순종가운데 가두어진자와 만날 때 주님이라는 분이 증거됩니다. 불순종가운데 가두워진 자와 만나지 않는다면 주님이라는 분은 드러날수 없습니다.
로마서8장21,22절에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니느라”
이 말씀을 왜 하셨는지를 11장에 36절에 와서야 우리들은 분명이 알게 됩니다.
주님을 전하기 위해 피조물조차도 썩어짐의 종노릇 해야 한다는 사실말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누가 만들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일장에 나오듯이 오직 빛을 전하기 위해 어둠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결국 세상은 주님만을 전하기 위해 돌아갑니다.
어떻게 주님을 전합니까? 어둠으로 주님을 전하지요. 그래야만 주님만이 빛이심을 전할수 있잖아요. 그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참으로 아쉬어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냥 믿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아쉬어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큰 결심을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 않아야지. 나는 말씀에 순종해야지. 그래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했으니 오직 주님께만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야지.
주님께 영광돌리려면 말씀에 순종해야지. 그래서 말씀지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인간들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불순종가운데 가두워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믿으니 당연히 이제는 불순종하는 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한 자들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런 자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제 더 이상 소용없습니다.
이들은 모든 만물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말씀이 싫습니다.
자신들이 뭔가 주도권을 갖고 주의 일에 보탬이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가르치는 것이 말씀대로 살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살자라는 주장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신이 아무것고 할수 없다는 사실을 싫어합니다. 자신이 무슨일을 해도 죄아래 갇혀 살기 때문에 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씀이 싫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아래 갇혀 있기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반드시 이런식으로 그 죄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거져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이 그렇게도 싫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떻습니까?
주님만을 전하기 위해 반드시 자신은 죄인으로 드러나야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매일 말씀을 상고해야 하고 피차 권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십자가의 피만 높아지고, 전해야 될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되신 예수님밖에 없게 됩니다.
이 일을 위해 성도가 주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신으로 만드려고 하는 인간들은 이 십자가 복음앞에 짜증을 낼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36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외칩니다.
그러나 로마서 11장36절 말씀은 십자가의 피를 전하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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