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산 제물
로마서12장1
로마서1장18절에서 11장36절까지의 내용과 12장부터의 내용이 상당히 다릅니다.
사실 로마서 1장1절에서 17절까지 읽고 12장으로 넘어가도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1장17절을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리고 12장으로 넘어가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어떻습니까?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삶은 곧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다. 그러면 어떻게 행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냐? 즉 어떻게 행하는 것이 영적 예배인가?
2절에 나오지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멋지지 않습니까?
얼마나 쉽습니까? 얼마 전에 교회홈페이지에 어떤 분이 마태복음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린 자녀가 교회에서 이 부분을 배웠던 모양입니다. 좀 쉽게 설명해 줄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방금 전에 로마서 1장17절에서 로마서 12장으로 넘어가면 얼마나 쉽습니까?
12장2절부터는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아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가면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로마서 12장 이하에 나오는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라고 해 버리면 얼마나 간단합니까?
무엇이 간단하냐고요? 믿음은 추상명사 아닙니까? 그런데 사는 것은 실제 내용이잖아요?
추상명사는 내가 붙들 수 없잖아요. 그러나 내가 어떻게 행동했을 때 그것이 믿음이라고 해 주면, 그것이 영적 예배라고 해 주면 얼마나 쉽고 속이 시원합니까?
오늘날 교회가 이런 식으로 설교하잖아요. 믿음, 영적 예배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포착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 이하에서 이렇게 친절하게 구체적으로 영적예배란 이런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성경이 분명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이들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동일한 성경을 두고 말입니다.
저들의 논리는 간단하지요. 말씀대로 보자는 논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반박하겠습니까?
말씀대로 보면 당연히 믿음으로 사는 우리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말씀이 그렇잖아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하잖아요.
여러분들은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참 어렵지요.
로마서 12장으로 넘어오게 되면 사람들은 로마서 1장18절에서 11장36절 말씀을 모두 다 잊어버립니다. 아니 기억할 이유가 없지요.
앞서 제가 말씀드렸지요. 1장17절에서 12장1절로 건너뛰어도 아무런 장애가 없잖아요. 평소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신앙생활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로마서 1장18절에서 11장 36절을 집어넣게 되면 머리 아프잖아요. 복잡하고. 이 내용 없어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잖아요. 믿는 것이 무엇인지 12장부터 쭉 말씀해 주시잖아요.
그러면 로마서 1장18-11장36절 말씀을 버릴까요?
만일 로마서 1장17절에서 12장으로 곧장 뛰어 넘어 성경을 읽고 말씀대로 살자라고 주장하게 되면 누구의 주장과 같아집니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어떤 신앙을 가졌습니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이 왜 중요합니까?
그것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은 인류전체가 갖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대변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그 신앙에서 인간들은 한발자국도 더 나가지도 되돌아가지도 않습니다.
배경 판을 콱 박아 놓았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들의 신앙만 되풀이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분명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지요. 그리고 그다음 이들은 말씀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율법대로 살려고 무진장 애쓴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렇게 비판할 수 가 있겠지요. 그들 나름대로의 최선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들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했지요. 자신들의 시대적 상황에서 자신들이 이해한 율법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했지요.
마가복음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을 때 어떤 서기관들이, 성경 전문가들입니다. 이들이 속으로 신성모독이다.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할 수 있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생각이 잘못입니까 아닙니까? 잘못 아니지요.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죄를 사할 수 있잖아요. 구약율법에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라는 자가 죄를 사한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서기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말씀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했습니다. 왜. 말씀대로 살아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금식이 단순한 금식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이 이사야 58장을 모를까요?
이사야 58장1-9절을 봅시다.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움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 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며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니라”
금식의 의미가 무엇인지 상세하게 풀어주셨지요. 이 말씀을 모르겠습니까?
말로만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위로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18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한다고 나와 있지요. 바리새인이 아니라도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들이 금식하는 것이 어떤 금식인지도 다 알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19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질문에 대한 답변이 참으로 황당하지 않습니까? 우리야 언제나 예수님 편이니 예수님의 답변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말씀대로 금식을 왜 하지 않는지를 설명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금식은 누구를 증거한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을 전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수님 자신과 연결시켜 말씀하십니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지요.
안식일의 주인이 인자라는 말씀은 곧 안식일은 예수님을 증거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는 대화 불가입니다. 대화가 안 됩니다.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신랑을 빼앗길 날을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제자들이 금식했습니까? 숨기 바빠서, 아마 밥 먹을 정신이 없어서 자동적으로 금식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금식했다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팔아먹고, 부인하고 저주하기 바쁜데 이 말씀이 생각났겠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언제 금식하라는 말씀입니까? 신랑을 빼앗길 때,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성령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고 했는데 . 그러니 금식은 근본적으로 인간들이 지킬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금식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습니까? 자신들이 지킬 수 있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금식 기도합니다.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도 인간들은 새포도주를 자꾸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말씀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은 철저하게 말씀에 근거한 삶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본문 로마서 12장을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할까요?
그야 당연히 유대인들식으로 해석합니다. 이미 설교 서론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몸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로마서 12장 2절 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첫째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셋째 변화를 받아야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내용이 구체적이지 못하니 10절부터 보면 첫째 형제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둘째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셋째,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마십시오. 넷째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십시오. 다섯째 소망 중에 즐거워하십시오. 여섯째 환난 중에 참으십시오. 일곱째 환난 중에 기도에 항상 힘쓰세요. 여덟째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십시오. 아홉째 손 대접하기를 힘쓰세요.
물론 14절 이하에도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이렇게 가르치면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이렇게 살려고 하겠지요.
그러면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도대체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또 설명해야 되겠지요. 다시 탈무드가 나옵니다. 적용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항목을 알려 줍니다. 형제 사랑이라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합니다. 아픈 형제가 있으면 찾아 갑니다. 찾아갈 때에는 빈손으로 가지 않습니다. 가기 전에도 기도 하고, 가서도 기도하고, 다시 돌아 와서도 기도합니다. 형제를 위해 일 주일에 최소한 10분은 기도하는 것이 형제 사랑입니다. 이런 식으로 설교하면 듣는 사람 참 편하지요. 물론 지켜야 된다는 부담감도 있지만 어차피 자신도 알아요. 완벽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름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설교 들은 것 같지 않습니까? 오늘 돌아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이런 식으로 로마서 12장 이하를 해석할 것 같으면 로마서 1장 18절에서 11장은 왜 있습니까?
찢어 버려도 되잖아요.
아마 버리고 싶은 사람 한 둘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무슨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까?
율법의 기능이 들어가 있지요. 율법은 죄를 더 짓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7장 9절을 보면 성령 받게 되니까 계명이 비로소 사도바울에게 이르렀습니다. 성령 받지 않았을 때에는 율법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는 자신이 살았습니다. 자신이 살았을 때 사도바울이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율법을 지키려고 행동했지요. 그런데 성령 받게 되니 계명이 비로소 자신에게 도착했습니다. 성령받기 전에는 계명이 자신의 맞은편에 있었지요. 계명이 자신에게 도착하니 죄는 살아나고 자신은 죽었습니다.
이것을 로마서 12장으로 가서 적용해 봅시다.
사람들은 로마서를 찢어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과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무슨 말인고 하면 12장 이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신 권면의 말씀이라 생각하려고 하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권면의 말씀으로 생각하게 되면 로마서 12장 이하의 말씀은 로마서 1장 18-11장에 들어 있는 말씀에 적용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우리 몸을 드리도록 노력합시다라고 주장하고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 어디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 말씀 아닌 부분이 있습니까?
로마서 12장 이하는 사도바울편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을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까 아닙니까?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과 사도바울이 성령을 통해 하시는 이 말씀 모두다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왜 만물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셨을까요? 이미 로마서 1장에서 복음, 즉 하나님의 아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들, 그냥 아들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전하라고 모든 만물이 존재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4장으로 가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지적한 예수님을 선지자로 이해한 여자는 예배를 어디서 드려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사마리아 사람이고 예수님은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그리심산에 있는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 즉 죄용서를 받아야 하는지 고민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 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느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런데 메시야를 만난 여인이 영과 진리로 예배했습니까?
예배 했지요. 그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자신의 죄가 예수님 앞에 모두 드러났고 그 죄용서함을 받은 자의 모습은 오히려 내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들춘 그분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는 말은 우리 몸을 사용하셔서 철저하게 십자가만을 전하게 하셔서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영적 예배란 이 여인처럼 죄가 드러나는 현장에서 예수님이 전파되는 것이 영적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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