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40 12장1-1 합당한 예배

푸른 섬 2013. 8. 18. 12:40

합당한 예배

로마서12장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이 우리들을 유혹합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권하노니라는 단어와 드리라 라는 단어가 우리들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특히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영적 예배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에서 영적예배라 하는 것은 사실 헬라어에서는 합당한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영적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합당한 예배라고 쓴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우리 성경에서는 영적 예배라 번역했습니다. 번역이야 문제가 되겠습니까? 물론 해석해 들어가면 합당한 예배야 말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들이 여기에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18-23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 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여기에 우상으로 바꾸었다는 말이 나오지요.

우상으로 바꾸어서 무엇을 했습니까? 예배를 드렸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 부분을 이방인들이 이런 짓을 했다라고 생각을 하기 십상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런데 구약을 읽어 보면 이방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도 그렇게 했습니다.

예레미아1장16절을 보면 “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유다 나라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했습니다.

이방인이든, 이스라엘 백성이든 모두가 다 합당하지 않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합당하지 않은 예배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을 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예수님을 죽였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는가에 관심을 둡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성경을 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피하는 방법,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는 방법을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아서를 읽으면서 우상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자라고 결심하고 또 결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 예배를 드려야지라고 결심하고 또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하는데 내가 이 권면의 말씀을 들어야지.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야라고 마음을 다 잡아 먹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무엇이 합당하지 않는 예배인지, 무엇이 합당한 예배인지 충분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로마서 12장1절에 나오는 합당한 예배라는 단어가 그냥 툭 튀어 나온 말씀이 아닙니다.

로마서 1장에서 우상을 섬기는 모습이 합당하지 않는 예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합당하지 않은 예배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율법지키기입니다. 첫 번째 문제되는 예배는 누구나 다 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자는 것이 합당하지 않는 예배라는 것은 우리의 예상을 깨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분명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다. 구약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이 어떠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이 어떠했습니까? 이들이 우상을 섬겼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말씀에만 순종했습니다.

말씀대로만 살았습니다.

이들이 왜 말씀대로만 살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구약성경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과거사를 잊지 않고 있지요. 몇 일전에 광복절인데,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지요. 그래서 한국이나 중국이 열 받고 그러잖아요.

자신들이 과거사를 잘 기억하는 나라가 있지요. 독일입니다. 독일은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하게 반성하고 인정하는 국가지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정답은 말씀대로 살기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요, 영생을 얻는 길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우상숭배는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모든 생활에서 말씀대로 살기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들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들에겐 율법이 자신 밖에 있으니 결코 율법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들에겐 오직 율법 지킬 수 있다는 생각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이런 생각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7장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예수님을 만나기전 사도바울의 모습이 어떠했습니다.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지요. 이런 모습을 두고 자신이 살았다라고 표현하고 있지요.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이 이런 모습입니다.

누가 보아도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 보이며, 모든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삶의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이 어떤 삶이라고 규정합니까? 합당하지 않은 예배라고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합당한 예배입니까?

로마서7장9절을 보면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그러면서 결국 자신은 곤고한 사람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탄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 이 모습이 바로 합당한 예배의 모습입니다.

로마서4장에서는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요?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아브라함은 바로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이 모습이야 말로 합당한 예배의 모습입니다.

다윗의 믿음도 동일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합당한 예배입니다.

그런데 우린 로마서12장1절을 읽으면서 무슨 예배를 떠올립니까?

영적예배? 어떤 영적 예배를 떠올립니까?

이렇게 우리들이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까하여서 주님께서는 합당한 예배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꿈꾸는 예배를 완전히 산산 조각내 버리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꿈꾸는 영적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료를 찾아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영적예배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왜냐하면 2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도무지 우리가 할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초자연적인 힘으로 이런 삶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배우고 , 살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게 종교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 아닙니까?

12장 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로마서에서는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죄밖에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5

자비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실까요?

기대하시는 것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니 권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기대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바로 육을 갖고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1장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성령 받은 자는 누구의 증인으로 살아갑니까?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예수님입니까?

바로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들은 권능을 받고에 관심이 있지요. 여기에서 권능은 당연히 병고치고, 죽은 자 살리는 권능이라 생각하지요. 그런데 이것이 권능이 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마귀가 원하던 권능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생각하는 권능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권능은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하는 권능을 부정하는 권능을 말합니다.

로마서8장35-39절에 나오지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런 일들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온 몸으로 겪으면서 십자가 사랑을 전합니다. 구경꾼이 아닙니다.

육의 몸을 철저하게 사용하셔서 십자가의 능력을 전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일을 겪으면서도 자신은 어떤 자입니까?

환난 받으니 나 의인이요, 구원 받았어요 하는 자일까요?

아니면 지금 예수님을 전하는 것 때문에 나는 박해 받아요라는 소리를 하는 자일까요?

나 넉넉히 이겼어요 하는 자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방금 전에 말씀드린 이런 식의 신앙생활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것과 사뭇 다릅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15,16절을 봅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사도바울이 디모데 전서를 쓴 시기가 AD 63년경입니다. AD34년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으니 몇 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사도바울이 행한 일이 적습니까? 그런데 그 자신을 뭐라고 합니까? 죄인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고 사람들은 또 사도바울 자신이 과거에 예수님을 믿는 자를 잡어 죽였으니 이런 말을 하지 않느냐 할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죄인의 괴수가 따로 있고 없고가 없어요. 그런데 왜 사도바울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말할까요?

그것은 바로 긍휼, 하나님의 자비하심, 즉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속에 살았기에 자신은 죄인의 우두머리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합당한 예배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