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
로마서16장1-16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어떤 사람들이 하나임을 말씀합니다.
뵈뵈라는 여자 분이 계신데 이 사람을 주안에서 합당한 예절로 그녀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뵈뵈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 줍니다.
그녀는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라고 합니다.
지금 뵈뵈는 누구와 관련된 사람입니까? 사도바울과 관련된 사람이지요. 뵈뵈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아니면 사도바울과는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인 뵈뵈가 여러 사람과 사도바울의 보호자 되었든 것과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무슨 상관있습니까?
제가 어릴 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형제고 자매라고 말입니다.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커서 보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정말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거의 만나 보기 힘들 지경이지요.
어찌 되었든 어릴 때는 순진하게 오늘 본문 말씀 같은 것을 읽으면 감동이 되었어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인데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형제처럼 영접하는, 예수님처럼 영접하는 모습이야 말로 진정 믿음 있는 사람들의 모습 아닌가?
뿐만 아니라 뵈뵈가 사도바울과 무슨 상관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때문에 바울의 보호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어떤 주석을 보니 이런 내용을 두고 낭만적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낭만적이라는 말의 뜻은 두 가지 정도가 있어요. 하나는 비현실적이고 신비적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감동적이고 달콤한 분위기다.
아마 주석가는 후자를 말했겠지요.
감동적이고 달콤하다는 쪽으로 말입니다.
우리들이 보기에도 너무나 감동적이고 달콤한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꿈을 꿉니다.
감동적이고 달콤한 성도들과의 관계를 말입니다.
사실 이런 관계는 이단들이나 사이비 종교집단들이 더 잘하지요. 그들은 정말 형제보다 더 친밀하게 지내지요.
그런데 우리들도 은근히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을 보게 되며 성도들 간의 관계가 너무나 친밀하잖아요.
4절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경우는 사도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 놓았다고 합니다.
참 이런 성도 만나 봤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모습을 보고 사도바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그들에게 감사한다고
합니다.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감사할까요?
사도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잖아요.
우리 같으면 어떻습니까?
그건 사도바울 일이고. 나와 무슨 상관 있느냐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지금 사도바울이나 뵈뵈나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라 브리스길라나 아굴라나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 된 교회, 참으로 우리들이 꿈꾸는 교회상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모습은 사이비 집단들이 더 잘 보여줍니다.
제가 지금 성경말씀이 문제가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읽는 자들이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성경 말씀을 대할 때 이미 자신들이 원래 꿈꾸든 것을 성경말씀으로 적용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만의 성을 만듭니다.
그들 눈에는 오늘 언급되는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몰라요.
오늘 나오는 사람들이 완벽한, 완전한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도 성경본문을 읽을 때 그런 착각에 빠져들지 않습니까?
낭만적이 되지 않습니까?
이야. 완벽한 교회의 모습이야. 이런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 있으며 얼마나 좋을까?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사람, 나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고.
유병언씨를 위해 내가 얼마든지 감옥갈수 있고. 근데 왜 유병언씨는 그 사람을 위해 감옥가지 않지요?
내가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공급해 주고, 또한 나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공동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입니까?
우린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살수 없다는 것을 늘 망각해 버립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우린 십자가의 피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꿈과 나의 이상과 만나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보면서도 무슨 생각을 할까요?
주님의 피만을 자랑하는 성도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믿음의 삶을 살았다는 사람과 만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살아야지. 이렇게 행동해야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자가 이런 본문을 만나니 그 해석이 십자가의 피를 자랑하는 말씀으로 해석하지 않고 인간의 신앙생활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도 뵈뵈처럼, 로마에 있는 성도처럼 살아갑시다.
아니면 브리스길라나 아굴라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처럼 살아갑시다라고 설교하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을 쉽게 설교하려면 여러 사람과 사도바울의 보호자가 된 뵈뵈처럼 살아갑시다라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도 쉽게 이해 되잖아요.
뵈뵈같은 사람이 있으면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소용되는 바를 도와줍시다.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립시다.
이런 설교가 깔끔하잖아요. 결심하게 하잖아요.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것 같잖아요.
그러나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행위들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 없어요.
뵈뵈가 무엇을 목적하고 사도바울의 보호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다르게 말하면 주님이 뵈뵈를 여러 사람과 사도바울의 보호자로 만드셨지요.
그러니 뵈뵈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꾼 적이 없어요. 남을 위해 죽겠다는 계획도 없어요.
보호자가 되겠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보호자가 되어서 정말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야지 하는 것도 없어요.
주님이 뵈뵈를 창조해 내셨지요. 그러니 뵈뵈를 영접하는 로마교인들도 주님이 창조해 내십니다.
제가 왜 이렇게 말씀드리는고 하면 교회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집단이 아닙니다.
성령의 공동체로, 주님의 영이 만드십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것은, 성도와의 관계라는 것은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무슨 이권관계가 있길래 겐그리아 교회 일꾼인 뵈뵈를 영접할까요?
도움 되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뵈뵈가 오면 시간, 돈 등, 여러 가지를 손해 봐야 합니다.
사도바울을 보호하면 돈 더 많이 벌수 있습니까?
아니면 오래 삽니까? 자식이 잘됩니까?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이 사도바울 같은 분을 영접하면, 부자 되고, 건강해 지고, 자식 잘되고, 사업번창하고.
이런 꿈을 꾸잖아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보세요. 사도바울을 위해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어 놓았습니다.
목 내어 놓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내가 죽어 내 조국이 잘된다도 없어요. 내가 죽어 내 집안을 살리겠다가 아닙니다.
우리 같으면 어차피 주님이 죽이시는데 죽이세요, 내가 대신 죽을 이유 뭐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런 식으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을 끄집어내게 하시지요.
주님이 일하시니 너는 너고 나는 나다는 식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의 모습니다.
그러니 복음 아는 사람 만나면 반갑지도 않아요. 저 놈이 또 나에게 뭘 뜯어 먹어갈까를 염려하지요.
그런데 주님은 네가 가진 사랑을 증거하라고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문안하라는 말은 그냥 문안이 아님을 아시지요?
함께 십자가 지신 주님과 동행하자입니다.
그런데 표현을 그렇게 하지 않고 문안이라는 방식으로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땅에 사는 자들에게 땅의 언어로 표현하는 겁니다.
우리들이 문안하는 이유는 무엇인과 나와 관련되어 있고, 특히 영업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문안하지요.
목사들이 교인들이 교회에 빠지지 않고, 헌금 잘하게 하기 위해서 문안하고, 교인들은 목사들에게 문안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정치인들은 어떻게 하면 잘 보여서 좋은 자리에 발탁될까해서 문안인사 하잖아요.
새해가 되면 저마다 선물을 들고 문안인사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문안은 무슨 이익관계가 없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문안합니다.
오로지 십자가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았기에, 그 용서함의 흔적들이 있기에 문안합니다.
그 흔적들이 있기에 추천하고 부탁을 하고 부탁을 받는 겁니다.
그들의 삶이 너무나 올바르게 완전하기 때문에 소개하고, 소개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자꾸 십자가의 피로 보려고 하지 않고 선악과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피를 전하는 자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전하는 자들을 좋아하고 좋게 생각합니다.
즉 말도, 행위도 괜찮은 사람들을 좋아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면 좀 예의도 바르고, 성질도 온유하고, 대화도 통하고, 함께 놀아도 거칠 것이 없는 사람들을 원하잖아요.
만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물 여섯 명과 함께 신앙생활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고린도 전서1장26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우린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를 좋아하지요. 능력 있는 자, 학벌 좋은 자를 좋아하잖아요.
그런 사람과 교제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부르실 때 의도적으로 이런 것들을 제거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는 유대인, 이방인, 남자, 여자, 노예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사장들은 사장들과 놀고 싶어 하지요.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대학 나온 사람들과 놀고 싶어 하고, 서울대 나온 사람들은 서울대 나온 사람들과 놀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향우회를 만들까요? 자신과 대화가 되는 사람과 놀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자랑하는 것이 십자가의 피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지식이 많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험을 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말을 잘한다는 것도 아니에요.
주님께서 불순종 가운데 가두셔서 십자가의 피로 베푸시는 긍휼을 증거하기 위해 나를 불렀다는 것을 믿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이들은 함께 있다, 떨어져 있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로마에 있던 겐그리아에 있든 어디에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의 피 흘리심의 흔적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만들어 내신 것들을 자랑하고 감사합니다.
'로마서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강해 78 안부 (0) | 2014.07.06 |
---|---|
로마서강해 77 주님을 섬기는 자 (0) | 2014.06.29 |
로마서강해 75 평강의 하나님 (0) | 2014.06.15 |
로마서강해 74 기도 (0) | 2014.06.01 |
로마서강해 73 기쁨의 연보 (0) | 2014.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