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안
로마서16장21-23
문안한다는 단어가 16장에서 상당해 많이 나옵니다. 스무 번 정도 나옵니다.
문안 하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샬롬입니다. 평안이 있기를 원한다는 말이지요.
평안에 대해 김진홍목사가 샬롬을 네 가지로 풀어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인데 죄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해결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의 첫 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시어 하나님과 나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셨다.
둘째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다. 십자가가 가로 세로를 이루는 것은 세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세로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이다. 두 관계가 합하여 십자가를 이룬다.
셋째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이다. 우울증, 열등감, 우월감등은 나와 나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한데서 생겨나는 마음의 병이다.
넷째는 나와 환경, 나와 물질과의 관계이다. 우리들 주변에는 물질관계 재물관계가 투명하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도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질적으로 그릇된 관계에 휘말려 들기 쉽다.
네 가지에 대한 평안을 들어보니 결국 평안이란 누구와 관련된 평안입니다.
‘나’라는 주체와 관련되어 있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나는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땅에 살고 있지요. 땅에 살고 있는 자가 누리는 평안을 말하고 있지요.
사실 이런 평안을 말하지 않는 종교가 있을까요?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이런 평안을 설교하는 것이 평안을 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27절을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분명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주는 평안은 어떤 평안일까요?
천국 간다고 하면 평안하지 않습니까? 타인과 관계가 좋으면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다면 어떻습니까? 물질, 환경과도 부딪치지 않으면 평안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근호 목사님 설교를 듣는 중에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걱정해 본적이 있느냐고요?
우린 자나 깨나 자기 걱정, 가족 걱정뿐이지요. 회사든 민족이든 나라든 모든 것이 자기 자신과 가족걱정의 확대일 뿐입니다.
이런 걱정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소원이지요.
이런 평안을 빌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앞서 말한 김진홍 목사 같은 설교를 하면 듣는 사람 기분이 업업 되겠지요.
이런 평안은 세상이 주려는 평안입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게 되며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굶주리시니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지요.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 되게 하라는 겁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굶주림은 없어야 한다. 먹는 문제는 당연히 해결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아라. 말씀대로 산다고 했으니 말씀대로 하나님의 사자들을 명하여 그들의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는지 보자고 합니다.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능력이 있어야지 말씀대로 산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런 말은 네가 믿음 없으니 하는 말이지. 믿음 있다면 당연히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면서 마귀 자신에게 절하라고 합니다. 절하면 다 주겠다고 하지요.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권세와 영광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 믿는데 성도들도 한 두명이고, 건물도 없고, 그게 뭡니까?
적어도 수천 명은 모여야 하고, 정치인들도 머리 팍팍 숙이고, 자동차도 BMW 7 시리즈는 기사 끌고 다닐 수준 되어야지.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떡이 없으면 평안합니까? 평안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했어요. 우리 성경 아무리 읽어봐요. 그게 사는 건지. 돈이 안돼요. 먹을 게 안 나온다 말입니다.
배고프면 평안이 사라져요. 말씀 읽는 것도 귀찮아요. 요즈음 배가 너무 불러서 성경 읽는 것이 싫은 시대지만 말입니다. 떡이 중요하지 말씀이 중요하지 않아요.
떡이 평안을 주지 말씀은 평안을 안 주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어요.
그러자 마귀가 말씀대로 해보라는 겁니다.
말씀대로 능력 보여라는 겁니다. 얼마나 말씀 믿는지 보자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끝입니다.
이런 말은 누가 못합니까? 그런데 우린 어떻습니다. 할 수 있다면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고 싶지요.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싶잖아요. 그러다 죽지만.
마귀의 졸개인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평안을 누린다고 생각해요.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은 어떻습니까?
지금 아이들이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열심히 일을 합니까?
남들보다 더 높은 권세, 더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아닙니까?
타인이 나를 멸시하고, 조롱하고, 우습게 여기면 좋습니까?
왜 자꾸 큰 회사, 큰 집, 큰 차, 큰 교회를 하고 싶어 할까요? 그래야 권세 가진 것 같고 영광 받을 수 있잖아요.
그저께 안 일인데 저희 딸 이종사촌이 있어요. 사학년인데, 이학년 처음 시험 칠 때부터 4학년까지 줄곧 전교 일등이랍니다. 물론 학군도 아주 좋은 학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아 저주네. 이렇게 말하는 사람 있을까요?
그 집 평안하지 않겠다고 할 사람 있습니까?
엄마 아빠는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초등학교 2학년이 밤11시30분까지 공부한답니다.
예수 믿으면 그 정도는 해 주어야 하나님께 영광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론 예수 안 믿어요. 저희 딸 때문에 성경책은 읽는답니다. 물론 너무 재미있어서 읽는데요.
평안이라 자녀가 시험 잘 치면 온 집안이 평안입니다. 물론 얼마 못가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세상이 주는 평안과 싸움을 하셨습니다. 전쟁을 하셨지요.
마귀가 갖고 오는 세상이 주는 평안은 평안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밥 먹는 것 해결된다, 능력 있다, 세상권세와 영광을 가졌다 이런 것은 평안 축에 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이런 평안을 빌고,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평안을 빌라는 말은 분명 이런 뜻이 아니지요.
세상이 주는 평안을 주는 자들은 지난 주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자기들의 배만 섬기는 자들이 잘 합니다.
사람들이 안 넘어갈래야 안 넘어 갈 수가 없어요.
앞서 예를 든 어떤 목사의 설교처럼,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처럼.
사람들이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해요. 땅의 이치에 맞는 이야기를 해요.
모두가 자기 배를 신으로 믿는 자들이기 때문에 얼마나 잘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평안을 빈다고 하잖아요.
바울의 동역자 디모데가 나오고, 바울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 그리고 로마서를 기록하는 더디오도 주안에서 문안한다고 합니다. 또한 바울과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하지요.
16장1절에서 16절에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여기에 나오는 성도들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울과 함께 하는 자들이 문안하고 있지요.
상호 문안합니다.
도대체 이들이 비는 평안이 어떤 평안일까요?
세상이 주는 평안을 빌고 있을까요?
그건 아니지요. 그렇다면 이들이 서로 비는 평안은 어떤 평안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도구로 마음껏 사용되어 지는 위치에 있는 자로서의 평안을 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의 일꾼으로 일을 하고, 목숨도 내어 놓을 수 있고, 남들이 아무도 믿지 않아도 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어요. 형제들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해요. 복음 때문에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혀요. 주안에서 많이 수고해요.
함께 고난에 동참해요. 바울과 동일한 마음입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온 교회를 돌보아 줍니다.
이 내용들을 보면 세상이 주는 평안과 너무 관련이 없어요.
이들은 마태복음10장34-39절 말씀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로마서16장에 나오는 자들이 서로 비는 평안은 이런 평안입니다.
세상의 화평을 깨어 버리는 평안을 빌고 있습니다.
자기 가족보다 우선인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러니 부부가 함께 바울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고, 더 많은 수고를 하지요. 가족을 위한 더 많은 수고가 아니라 형제들을 위해 더 많은 수고를 해요.
온 교회를 돌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이 주는 평안은 깨어져야 하지요.
로마서16장에 나오는 평안을 비는 이들의 특징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산산이 깨어지는 자들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주님 걱정하고 사는 자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이들을 주님께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께서 만드셨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말씀 앞에 우리가 만들어내고 조작하는 평안은 깨어져야 하겠지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이 주는 평안은 평안이 아님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오히려 세상이 주는 평안에 속지 말라고 외치는 자들이지요.
우리도 늘 마귀에게 속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 주님이 주는 평안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성도들은 마귀가 주는 평안이 평안이 아님을 분명히 아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이 진짜 평안을 얻은 자입니다.
이들은 늘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리에 있지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에게만 주시는 평안입니다.
우리들도 서로 평안을 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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