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하나님
로마서 16장27절
성경말씀은 지혜의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지혜라 할 때에는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정신의 능력을 말합니다.
사람이 지혜 있다고 표현할 때에는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 합니다.
모태신앙인 사람들은 많이 들었을 겁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되라고 기도하고 가르치지요.
만일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다며 그 사람은 어떤 대우를 받게 될까요?
너나 할 것이 없이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왜 읽습니까? 성경 말씀을 왜 배웁니까?
전 그것이 궁금합니다.
지혜롭기 때문에 말씀을 보는지 아니면 지혜를 얻기 위해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지?
시편119편105절 말씀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의 빛이기 때문일까요?
창세기 3장에서 여자가 선악과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고 합니다.
먹음직과 보암직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는 표현은 우리들이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은 표현입니다.
우리가 과일을 보면서 보암직하다, 먹음직스럽다, 아니면 배부르겠다고 하지 음식이 무슨 지혜와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쁜 사과를 먹으며 지혜롭게 되고, 못난 사과 먹으면 어리석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성경구절 읽으면서 그런 생각해 본적 없나요?
분명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지요.
참으로 희한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어떤 과일이 여러분을 지혜롭게 할 것 같습니다. 호두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사단의 말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 이와 같은 현상입니다.
예를 들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사단이 개입하면 과일을 먹는 것이 인간 자신을 지혜롭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해 버립니다. 즉 하나님이 가진 지혜를 자신도 소유하여 하나님과 같이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브람이나 이삭이나 야곱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말씀만 주시면 그 말씀을 자신이 반드시 지켜서 자신이 얼마나 지혜로운 자인가를 보여 주겠다고 결심하고 행동에 옮깁니다.
사무엘하24장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다윗은 자신이 왕으로 세워진 것이 다윗 자신이 이스라엘 왕 노릇하라고 세우신 줄로 생각해 버립니다. 요압이 아무리 말려도 듣지를 않습니다.
내가 왕이다라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왕이 되었지만 다윗은 자신의 이스라엘 왕됨이 이스라엘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왕됨을 드높이는 데 사용합니다.
이미 지혜자가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지혜자가 되었다는 것을 더욱더 노골적으로 밝히는데 유용합니다.
누가복음16장에 지혜로운 청지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지혜로운 청지기의 본보기를 알려 주셔주셨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는 자가 자신의 청지기 직무를 다하지 못하게 됨을 알고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우니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장부 조작을 통해 자신의 앞날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주인이 이렇게 행한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 세대의 아들들이 누굽니까? 빛의 아들들이라 하는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지요.
당시 이들은 누가 보아도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고 하면 비웃었습니다.
물론 그 앞에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만 그러할까요?
이 땅에 사는 누가 보아도 비웃을 예수님의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비웃는다는 말은 자신이 돈을 사랑한다는 방증입니다.
스스로 빛의 아들들이요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비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겉으로 예수님 말씀이 무조건 옳지요 라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그래도 그건 아니지요가 되어 버립니다.
고린도전서 2장12절을 보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을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사람의 지혜와 대조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야고보서 1장5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고 합니다.
야고보서를 말하면 가강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행함이지요. 물론 믿음과 함께 떠오른다고 할 겁니다.
중요한 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으니 결국 행함이 아니겠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 결국 믿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야고보서나 로마서나 동일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 지혜는 반드시 땅의 지혜로부터 공격받고 조롱당하고 비웃음을 당합니다.
야고보서에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이 대표적임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미 이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지혜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받은 지혜가 지혜롭다가 우기는 자들 위에 펼쳐집니다.
그 지혜의 모습은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받쳤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두고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그러면 세상 지혜자들은 이런 행위를 두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엄청나게 욕하겠지요.
도무지 이런 믿음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 하지 않겠습니까?
다르게 표현하면 사랑하는 독자,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야고보서에서 말씀하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비웃음 거립니다.
예수님이 그런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마10:36). 이 말씀을 누가 좋아합니까? 누가 아멘 합니까?
사랑하는 내 자신, 내 목숨을 걸고 낳고, 목숨을 걸고 양육한 자녀가,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아내가, 남편이, 아버지가, 어머니가 주님의 원수 곧 나의 원수다.
생각하기도 싫지 않습니까?
나름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혜자가 말씀하시는 지혜는 자신이 가진 지혜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지혜가 바탕에 깔리고 그 지혜가 깨어지면서 하늘의 지혜가 덮쳐진 상태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지혜입니다.
만일 인간에게서 나온 지혜라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고 행함이라고 정의를 내렸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의 행위를 행함이 있는 믿음, 즉 믿음이라고 하지요.
달리 표현하면 십자가를 제대로 증거했다는 말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5-16).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 먹이시고 십자가 지셨습니다.
떡을 주시면서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고 하십니다.
열두 제자외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가 버립니다.
십자가 이야기 하지 않으시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지 않는 자들은 돌려 보내야 합니다.
헐벗은 자를 입히고, 굶주린 자를 입히는 것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과 동일시합니다.
헐벗은 형제 자매에게 쓸 것 주는 것, 먹을 것 주는 것, 다르게 표현하면 사랑하는 것, 다르게 표현하면 십자가를 전하는 것, 다르게 표현하면 하늘에서 주신 지혜를 보여 주는 겁니다.
이러한 믿음은 십자가, 즉 자기를 부인하는 믿음이지요.
기생 라합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그 행함을 드러냈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요.
기생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 민족을, 자기 국가를 배반한 기생라합입니다.
행실도 올바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민족까지 배반한 라합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누가 동의 하겠습니까?
세리와 죄인의 친구, 창녀의 친구인 예수님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지혜되신 예수님은 이런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이 땅에서 라합같은 자는 배신자, 매국노라는 말을 듣게 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라고 칭찬하십니다.
그 행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로마서에서 지혜로운 하나님이라 하시지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전1:18-20)
기생라합이나 아브라함을 보면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한 것으로 보는 사람 누가 있을까요?
괜찮은 사람, 훌륭한 사람, 누가 보아도 믿음 있는, 지혜로운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전하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을 전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련한 자, 어리석은 자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조롱당합니다.
자신들이 내어 놓은 것이 십자가 지신 주님이 주신 것, 즉 은혜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하지요.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하고 찾는 겁니다.
십자가의 도, 즉 지혜는 세상의 천한 것들을,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폐하십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오히려 역전이지요. 십자가 전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요. 오히려 십자가 복음 전하는 자들이 폐함을 당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하늘로부터 온 지혜를 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도 인간들은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런 열매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뽐내려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다.
헐벗은 자 입을 것 주고, 굶주린 자 먹을 것 줌으로 세상사람 어느 누가 보아도 지혜로운 자라고 칭찬받는 자들이 있지요. 이런 자들은 지혜가 뭔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목 박혀 죽으셨습니까?
누가 보아도 나에게 도움 안 되고, 누가 보아도, 쓸데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데 눈곱만큼의 가치도 없기 때문에 죽였습니다. 죽여야만 자신이 살수 있다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에 죽였습니다.
성도는 지혜를 받았기에 지혜를 구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자들은 십자가의 길에 놓인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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