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77 주님을 섬기는 자

푸른 섬 2014. 6. 29. 16:11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

로마서1617-20

로마서를 읽고 연구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요?

로마서는 분명 주님의 영이 사도바울을 사용하셔서 기록한 말씀이지요.

 

그래서 우리들이 살펴보았듯이 주님의 영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합니다.

화목제물 되신 분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로마서입니다.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나 자신 조차도 그 주님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를 위해 태어나고 살려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주체자체는 주님이라는 분을 전하기 위한 하나의 소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소도구를 사용하고 그냥 버리는 소도구는 아닙니다.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합니다. 진노의 그릇으로 이용하셔서 끝이 아니고,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 넣으셔서 주되심이 영원함을 전하게 만듭니다.

 

또 하나는 긍휼의 그릇입니다. 이들은 사랑받도록 미리 정하신 자들입니다. 이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들은 이 땅에서만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시 영원히 죽임당한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율법을 주셔서 철저하게 저주아래 가두어져 있음을 확정해 버립니다. 그 확정하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서를 읽는 사람들이 성도라고 했는데 과연 읽는 자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일까요?

 

수년전에 저와 아주 친한 친구목사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성도는 누구냐?

 

여러분들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사실 이 질문을 누가 천국에 갈수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누가 천국에 갈수 있느냐고 하니 베드로가 떠오르면서 율법을 잘지 킨 부자청년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베드로나 부자청년이 성경말씀에 기록된 것은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천국 가는가에 있어요.

물론 이 질문 속에는 천국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어요.

 

부자 청년은 많은 재물과 함께 할 수 있는 천국을 꿈꾸었다면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은 높은 자리 차지하는 천국을 상상하고 기대 했지요.

 

그런데 이러한 기대는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기대하고 상상할 만한 천국 아닙니까?

 

성도가 누구냐? 누가 천국에 갈수 있느냐라는 질문은 복음을 전해 보면 언제든지 들을 수 있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이 질문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셨잖아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주님이 되심을 전하셨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니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천국 갈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에서 높은 자리 차지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내가 원하는 세상, 소망을 이룰 수 있습니까?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이런 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들은 상상이 안가지요.

복음을 그렇게 완벽하게 완전하게 전하신 예수님이신데 왜 사람들은 못 알아들을까?

왜 이해하지 못할까?

 

여러분 이런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지금 오셔서 복음을 전한다면 나라면 아멘아멘 할 겁니다라는 생각 하지 않습니까?

 

인간들은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자기 자신이 얼마든지 믿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는 자들이 많지요.

그런데 이게 믿는다고 믿어지는 것일까요?

 

요한복음11장에 보면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지요.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고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 그들에게는 가짜가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 가짜입니다.

안 믿어요. 안 믿으니 예수님을 원망하잖아요.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예수님께 원망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죽음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잠자는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마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자들은 죽음을 죽음으로 봅니다.

 

그러니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버리니 자신이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이 아님이 들통 나게 됩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했지요.

그러니 지나 개나 다 나 예수님을 믿어요.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잣대, 즉 기준점을 갖다 대 봅시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기준점은 사랑하는 오라비의 죽음입니다.

부자청년에게 기준점은 많은 재물입니다.

베드로에게 기준점은 자기 목숨입니다.

가룟유다에겐 자기의 원대한 꿈입니다.

 

기준점이 사람마다 그때그때 다릅니다.

우린 십자가만 믿으면 천국 간다고 생각하잖아요. 분명 십자가만 믿으면 천국 가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라는 기준이 트랜스포머에요.

재물로 바뀌었다가 목숨으로 바뀌었다가 자식으로, 아내로, 남편으로, 국가로, 민족으로, 돈으로 시시각각 바뀝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자기 배만 섬기는 자들이 나옵니다.

 

17절에 보면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합니다.

그러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배운 교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주도심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주되심을 반대하는 자들이 분쟁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성도들을 넘어지게 합니다.

 

이들이 왜 예수님의 주되심을 반대합니까?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자기들의 배만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한다고 합니다.

 

 

, 이렇게 되면 우린 이 말씀에서 어느 편에 있나요?

주를 섬기는 편에 있나요 아니면 주님을 섬기지 않는 편에 있나요?

순진한 편에 있나요 아니면 자기 배만 섬기는 편에 있나요?

 

19절에는 순종이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그러면 순종하는 편에 있나요 아니면 불순종하는 편에 있나요?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라고 하지요. 이렇게 살고 있나요?

 

인간들은 이런 말씀들을 보며 잽싸게 자기 자신을 누구 편에 집어 넣습니까?

당연히 좋은 편이지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읽으면 난 내 배만 섬기는 자가 안 되어야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질문하나 해 봅니다.

 

내 배만 섬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배만 섬긴다고 말씀하시니 우린 곧장 우리의 손가락을 타인에게 향합니다.

 

그러면 우린 나만의 배만 위합니까 아니면 주님을 섬깁니까?

 

우린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한 자들입니까?

선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죄로 드러나면서 오직 십자가의 피만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이런 것에 지혜롭습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피를 전하는 것을 싫어합니까?

 

몸이 있는 한 인간들은 항상 자기들 배만 위합니다.

몸 덩어리가 있는 한 인간들은 항상 선한 것을 싫어합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우리가 이미 순진한 자들 편에 서서,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편에 서 있어서 완벽하게 나의 배만 섬기는 자가 아니라면 이 말씀을 그래도 들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말씀을 듣고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면 그래도 힘이 나고 신이 나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께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한국에서 나이 칠십 넘은 목사들이 선교지에 가서 성경을 가르친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르치는 곳이 두 곳이 있는데 한곳은 식사를 그렇게 대접 잘한답니다. 예를 들면 보신탕을 꼭 대덥한답니다. 다른 한곳은 식사가 좀 시원찮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늙은 목사들이 보신탕 주는 곳을 좋아한답니다.

물론 그들이 가르치는 성경은 십자가와 상관없는 거짓 복음들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들의 배를 즐겁게 해 줄 곳을 좋아하고 그곳에 가서 성경가르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사무엘 상2장을 보면 늙은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이 나옵니다.

제사 드린 고기를 자기 배를 위해 갈고리로 끄집어냅니다. 뿐만 아니라 먼저 기름을 태운 후 제사장들이 고기를 가져야 하는데 날 것을 챙깁니다.

 

우린 아버지 엘리 제사장이나 그의 아들들에 대해 손가락질 하려고 덤빕니다.

 

사도바울이 사무엘 상2장을 모를까요?

잘 알고 있어요.

 

미가35절을 보면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것이 다만 목사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일까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자기 이익이 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어요.

목사들은 어떻게 하면 교인들 돈을 빼앗아 낼까에 관심이 있고, 교인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돈을 아낄까?

 

주님을 섬기는 것엔 관심이 없어요.

 

이렇게 되면 우린 또 다신 이런 반문이 생기겠지요?

성경에 분명 형제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교훈을 배운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순진한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들은 도대체 누굽니까?

 

바로 주님이 만드신 자들이지요.

 

그래서 20절에서 평강의 하나님이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게임 끝났다고 하지 않지요.

게임 끝났다면 이런 싸움 속에 놓여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실상은 게임이 끝났어요. 그래서 로마서 830절에서 이미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골로새서 214,15절을 보면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거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고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이미 이겼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로마서16장에서는 미래로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니 사람들은 헷갈리는 겁니다.

 

분명 로마서에서 주님이 누구신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신 믿음이 없다보니 자꾸 자신이 싸우고 자신이 이기려고 해요.

 

오늘 본문 앞에 주님 저는 내 배만 위합니다. 저는 선한데는 미련하고 악한데는 지혜롭습니다.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도무지 용서 받지 못할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하는 자가 주님이 만드신 순진하고 주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얻어터지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믿음이 없는 자들은 자기 행위에 관심을 둡니다. 나는 내 배만 섬기지 않을 거야. 나는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게 살거야라는 식으로 말씀을 대합니다.

 

주님이 만든 성도들은 주님이 흘리신 피와 만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주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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